대구와 경북 지역에 기쁜 소식을 전했던 아름다운 발자취를 찾아
[ 어서와 총회 사적지는 처음이지 ]
작성 : 2022년 10월 26일(수) 13:56 가+가-
10. 대구 및 경북 서남부지역: 대구제일교회(제13호), 대구YMCA(제15호), 청도풍각제일교회(제37, 37-1호), 성주후평교회(제40호)

성주후평교회

성주후평교회 내부
지난 14일 총회한국기독교사적(유물)협의회 회장 손산문 목사(자천교회)와 총회 사적지인 성주후평교회(제40호), 청도 풍각제일교회(제37, 37-1호), 대구제일교회 대구기독교역사관(제13호), 대구YMCA(제15호)를 찾았다.

이곳 저곳에 떨어져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고, 때로는 인적이 드물고 찾아가는 길도 험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지나며 손산문 목사는 말했다.

"이 외딴 곳을 방문하기 위해 100여 년 전 선교사님들과 조사들은 대구선교부에서 설교하러 이 길을 걸어다니셨을텐데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저는 사적지를 찾아가다 보면 초창기 선교사님들과 지도자들의 헌신이 생각나요."

그렇다. 길에는 단순히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는 사전적, 기능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 길은 고생을 마다 하지 않았던 선배 신앙인들의 열정과 눈물이 스며 있는 '영적 순례의 길'인 것이다.


풍각제일교회의 유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김영호 목사와 손산문 목사
#초기 한국교회 예배당의 특징 고스란히 간직한 성주후평교회


성주후평교회(김태선 목사 시무)는 1899년(혹은 1903년) 김기현, 정경도, 정형택 외 2인이 송정교회(현 후평교회)를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다. 1908년 경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신앙과 학문을 가르쳤고, 지역 사회를 계몽했다. 1915년에는 초가집 한옥예배당을 건축하여 본격적인 교회의 기틀을 세워나갔다.

이곳에서는 1919년 교인들이 성주 장날 3.1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후평교회 이판성 영수는 이웃하는 옥화교회 홍진수 영수와 3.1운동에 참여했다.

1915년 목조 초가로 건축된 한옥예배당은 1935년 지붕을 기와로 개량한 후 오늘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 예배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장방형의 ㅡ자형 예배당으로서 지붕은 우진각 형태로 되어 있다. 내부는 강대상과 회중석 그리고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방의 모습은 사라진 채로 있다. 예배당 가운데는 사각 기둥들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휘장 칸막이를 하여 남녀 성도들이 나뉘어 예배를 드렸다. 이는 초기 한국 교회의 남녀가 유별한 예배 모습으로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를 가진다. 예배당 정면과 후면 양 쪽에는 남녀가 출입하는 문을 각각 따로 배치하였고, 석회로 마감한 흙벽의 창은 현재 유리 창문으로 대체되었다. 예배당 뒤쪽에 배치된 두 방에도 출입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예배당의 이러한 내외적인 모습들은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 건축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흔적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후평교회는 열악한 상황에서 보수 정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손산문 목사 등 총회 역사위원들과 담임 김태선 목사는 성주군 향토문화유산으로의 등록을 추진해 성주군에서 7000만 원, 대구동남노회와 시찰회가 3000만 원을 들여 안전하게 보수를 마쳤다.

손산문 목사는 "경상북도 문화재 위원 장석하 교수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 10여 년 전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했지만 아직 실현 안되어 아쉽다"며, "후평교회 주변에는 가야산 국립공원, 무흘구곡 등 빼어난 명승지가 위치하고 있어 향후 교회 탐방을 비롯한 프로그램 개발과 활용에 있어서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미독립선언서 필사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목사.
#교회 역사 보존에 '진심'인 청도 풍각제일교회


1899년 김경수에 의해 청도군 최초로 설립된 송서교회는 경북 지역의 대표적 자생적 교회다. 송서교회는 1976년 풍각제일교회로 개명했다.

김경수는 미북장로회에서 파송된 아담스(J. E. Adams, 安義窩)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았다. 김경수는 아담스 선교사와 함께 이 시장 전도를 했는데 그들은 김양석, 조병종 등을 전도하고 송서장터 입구에 있던 김양석의 초당에서 예배 공동체를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청도 지역 첫 예배 처소가 됐다. 이에 근거해 김양석 초당은 청도 지역 최초의 복음 전래지이며, 선교 초기 시장 전도를 증거하는 유형의 역사 유산, 그리고 선교 초기로부터 현존하는 유일한 초가집 한옥 예배당이라는 교회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풍각제일교회 외관
이후 교회는 신자가 늘어나면서 1901년 명대동으로 예배당을 신축해 옮겼다. 1906년에는 다시 송서동으로 이전하고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과 계몽 운동에도 힘썼다. 현재 예배당은 다섯 번째 예배당으로 이때의 부흥 성장을 통해 1965년도에 건축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풍각제일교회는 첫 예배 처소뿐만 아니라 60년대 건축한 현 예배당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지금 예배당은 한국교회 예배당 건축의 변천 과정과 그 양식을 알려 주는 또 다른 교회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강대상 공간 구조, 남녀를 구분한 출입문 배치, 예배당 입구 포치(porch) 등은 초기 한옥 예배당을 이어 서구식 예배당 건축이 한국의 토양과 문화 속에서 어떻게 토착화 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려 준다.

풍각제일교회는 12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경북의 대표적인 초대 교회 가운데 하나로 개 교회로서는 상당한 역사 자료들(약 400여 점)을 보존·보관하고 있다.

보관 중인 역사 자료 중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1910년대의 송서교회 당회록 2권, 1896년 부산선교부 산하 내륙선교지회로 시작해 1899년 공식적인 선교부로 사역하던 대구선교부 주재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비품들도 당시 대구선교부의 선교 업무와 사역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유물들이다. 이중 선교사들이 어려운 한자를 효과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선교사 한자학습카드(1900년대 초)'가 눈에 띈다.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의 유물을 보고 있는 관계자들.
기미독립선언서 필사본도 귀한 유물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전국에 남아있는 인쇄본이 7권, 일본에 1권 정도만 보존되어 있는데 필사본은 이것이 유일하다. 현재 풍각제일교회는 문화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풍각제일교회 김영호 목사는 "부임 초기 손산문 목사님이 교회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주신 덕분에 장로님들도 우리 교회의 역사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며, "교인들이 역사적 작업을 통해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니 지역에서도 분위기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외관
# 대구 경북 지역의 母교회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구 예배당)


대구제일교회는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개신교회로, 1893년 4월 22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illiam M. Baird) 목사가 대구에 첫 발을 디딤으로 시작됐다.

1895년 대구선교지부가 승인된 후 1896년 이곳의 대지 420평에 있던 기와집 3동, 초가집 5동을 구입하고 수리해 교회와 선교기지를 마련했다. 이 곳에 이 지역 최초의 서양의원인 제중원(동산의료원 전신)을 개설했고, 신교육기관인 대남소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를 교회 내에 설립했다.

1908년 성도들이 증가하자 두번째로 140평의 단층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재래양식과 고딕양식을 절충했는데 목조기둥 사이를 회벽으로 마감했고, 지붕은 한식의 합각 지붕형태로 함석을 사용했다.

교회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박창운 담임목사(가운데)와 손산문 목사(왼쪽), 최무진 장로.
1933년 2층 벽돌조 연건평 448평의 예배당을 완고했고, 1936년 오른쪽의 5층 종탑을 증축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됐다.

이 건물은 남북으로 긴 평면, 앞면 중앙에 배치된 현관, 버트레스(부벽)와 첨두형 아치, 첨탑 등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조 근대 건축물이고, 건물하부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의 일부는 대구읍성(1907년 척거)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대구 경북지역의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지역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역사성과 규모,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이 건물은 60여 년간 예배당으로 사용됐고, 현재는 기독교역사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YMCA회관 외관
기독교역사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가치 있는 유물은 1898년 당회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당회록이다. 정식 당회가 구성되지는 않았지만 1898년의 기록으로 시기적으로 1904년 부산진교회 당회록, 1907년 새문안교회 당회록보다 오래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역사가들이 대구경북지역의 교회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1898년 당회록의 근거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담임 박창운 목사는 "우리 교회는 이 부분이 필요하다고 인식될 때마다 행동을 주저하지는 않았다"며, "초기 당회록이 한국교회사 속에서 중요함을 인식해 최근 데이터 베이스 작업을 했고 앞으로 영인화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교회 시무장로인 최무진 장로(대구기독교역사위원회 위원장)도 "초기 당회록을 총회 유물로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구3·8만세운동의 주역들이 활약한 대구YMCA회관


대구YMCA는 1915년 교남기독교청년회로부터 출발한다. 이 출발의 배경에는 미북장로교 대구선교부에서 활동했던 브루엔(H. M. Bruen)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청년 선교에는 YMCA가 교회보다 더 적합하다고 보고 대구YMCA 창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이만집, 김태련 등 당시 대구 교계 청년 지도자들과 함께 교남기독교청년회를 시작했다. 1918년 발회식을 가졌는데 발기인을 보면 선교사는 브루엔, 블레어(H. E. Blair, 방혜법), 플레처(A. G. Fletcher) 등이었고, 교계 청년 지도자는 이만집, 김태련, 백신칠, 권희윤, 김영서, 백남채, 김덕경, 정광순, 이재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대구3·8만세운동의 주역들이었다.

대구3·8만세운동 주역의 대부분은 교남기독교청년회 인물들이다. 교남기독교청년회가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으로는 기독교적 이념의 영향이 있었고 외적으로는 창립 전후 지역 사회에 팽배한 애국계몽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므로 대구 YMCA회관은 하나님의 생명, 평화, 정의를 실현하려는 대구YMCA의 모든 운동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정신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담고 있다.

대구 YMCA의 옛 이름은 교남YMCA이다. 교남YMCA 회관은 2013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제570호)로 지정됐다. 교남YMCA 회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3.1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이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고 또한,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1914년 건립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1층과 2층 사이를 돌림띠로 장식하고 창호 상부는 아치로 인방을 확보해 사각형의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20년대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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