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꼭 가져가라"
[ 땅끝편지 ]
작성 : 2022년 10월 25일(화) 08:15 가+가-
일본 강장식 선교사<1>

2008년 2월 고척교회에서 드린 총회 선교사 파송예배.

"성경은 꼭 가져가라." 일본유학을 반대하던 어머니가 짐을 싸던 필자에게 어쩔수 없이 유학을 허락하며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는 "그 원수의 나라에 가서 배울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역정을 풀지 못한 채 못마땅해 하셨다. 일제 식민지시대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일본 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감정이 격해지시는 분이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유학하기 위해 접근하기 좋은 일본, 전쟁패전을 넘어 세계에 도약하고 있는 일본은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필자의 억지논리에는 입을 다무셨다.

1989년 늦가을 일본으로 출발하던 필자는 가방이 너무 무거워 슬며시 성경을 꺼내 책상 서랍에 넣고, 해외 유학생활에 대한 설레이는 마음으로 25살 청년의 꿈을 품고 출발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과 필자, 지금은 일본 동경에 있는 작은 교회 담임목회자로서, 그리고 교회 밖 이 땅의 영혼들의 구원과 작은 힘이나마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믿는 가운데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첫사랑, 믿음의 성숙과 연단, 일본교회에 대한 안타까운 부담감에서 시작된 일본선교에의 부르심, 이 모든 것이 3대째 모태신앙이기는 했지만 교회와 복음의 주변만 맴돌던 필자가 복음의 황무지로 불리는 일본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오묘하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자신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 볼 때 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말씀 앞에 고개가 숙여 진다.

일본생활의 시작은 바닥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약속된 숙소는 없었고, 일본어학교도 3개월 뒤에나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본어 한 마디 못하던 필자는 결국 한자로 쓴 메모지를 들고 길거리에 나섰다가 한국어 관련 출판사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한국어 교정을 도와주는 대가로 작은 방까지 제공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은 방 주인은 신실한 크리스찬이었고, 교회에 충성하며 전도하는 아주머니였다. 스가와라 아주머니는 일본어를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무조건 자기 교회로 데리고 갔고, 내게 붙여 주신 천사와도 같이 내게 큰 도움과 힘이 되어 주었다.

이 분을 통해 겸손하고 신실하고 정직한 일본인 교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일본에 있지만, 말씀과 믿음이 깊게 내면화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필자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감동은 나로 하여금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물음표를 마음에 새겨 놓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 교회와 일본인 성도는 그렇게 방황하는 나의 마음과 나의 발걸음을 일본을 사랑하는 주님께 붙잡아 놓고야 말았다.

은혜로운 유학생활 중에 일본교회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헌신하였지만, 연단과 실수의 평신도선교사 과정을 거치면서, 건강하고 바른 목회, 장기적인 일본에서의 목회와 선교를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30대 중반에 한국에 귀국하여 장신대에서 신학과 선교의 훈련과정을 새롭게 거치게 되었다. 장신대의 신학과 고척교회로 인도하신 것은 주님의 은총이었다. 여러 교수님을 통해 신학과 선교와 말씀의 넓고 깊은 세계를 엿보게 해 주었고, 고척교회와 조재호 목사님을 통해서는 좋은 목회자와 건강하고 부흥하는 교회의 본을 보게 되었다. 실수 투성이의 필자는 한국에서의 좋은 신학교와 따뜻한 교회, 존경스러운 선배 목사님의 도움으로 2008년 2월 다시금 일본으로 돌아 왔다.



강장식 목사 / 총회 파송 일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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