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의 변증법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2년 10월 20일(목) 10:49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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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르케고르.

'육체의 가시'는 신앙인에게 잘 알려진 기록이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서 해방되기 위해 세 번의 큰 기도를 올렸으나 응답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말씀을 듣고 이를 자랑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약할 때 강함'의 믿음으로 전파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바울의 체험에서 절망과 체념의 관계를 발견하고 '체념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육체의 질병이지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은 정신의 절망이다.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은 자기다. 자기는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계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유한과 무한의 관계, 시간과 영원의 관계, 자유와 필연의 관계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만으로 인간은 아직 자기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주어진 관계에 다시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존재와 진정한 자기가 된다. 예컨대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신과 재차 관계할 때, 인간은 시간과 영원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자기로 변모한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관계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은 삼중으로 나타난다. ①절망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는 단계 ②절망하면서 자기로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단계 ③절망하면서 자기로 존재하려고 하는 단계. 절망의 삼중과정은 절망하면서 자기에 대한 의식이 아예 없는 단계에서부터, 자기 존재를 원하지 않고 삶을 포기하는 단계를 거쳐, 절망 속에서도 자기로 있기를 원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는 절망을 이겨내고 진정한 자기가 된다.

아픈 이는 누구나 고통이 사라지고 육체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고통당하는 가운데 세 번의 기도를 드린다. 사생결단의 이 기도는 절망 속에서 자신을 진지하게 살피는 의식적인 기도다. 이것은 고통의 의식이며 이 문제를 안고 기도에 집중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고 고통이 지속되면서 그는 다시금 절망한다. 이 절망은 아예 체념이 된다. 육체의 가시가 주는 고통,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는 한계상황, 이를 극복하려는 기도와 고통의 지속. 이것은 처절한 자기의 운동으로서 절망에서 체념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절망으로서의 체념은 자기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체념과 다르다. 일반적인 체념은 고통에 굴복하면서 자기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절망으로서의 체념은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자기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고통 속에서 자기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기도에서 들린 음성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다. 질병이 고통이 아니라 은혜라고 하는 음성은 너무 비합리적으로 들린다. 이 말은 위로를 주기는커녕 체념을 가중한다. 합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생을 포기한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병이 낫지 않고 기도도 응답받지 못한 것에서 체념하는 것은 상처받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이 지점에서 마음의 반전이 일어난다. 체념할 때 들린 음성은 체념의 이유였던 연약함 가운데 가장 강한 분이 동행한다는 것이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영원자의 음성은 체념하는 자에게 새로운 소망을 준다. 이 소망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고 자랑까지 할 수 있다. 체념이 기쁨과 자랑으로 바뀐 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이며 영의 운동이다. 인간은 연약하나 이 가운데 동행하는 영원자의 능력으로 그 연약함을 이길 수 있다. 약하다고 느끼는 그때 자기는 강할 수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체념의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자기는 새로운 자기가 된다. 육체의 연약함, 마음의 연약함, 어려운 삶의 과제 앞에서 한숨 쉬는 인간 가운데 체념의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다.

삶은 중단없이 진행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삶의 고통은 이 흐름 가운데 등장한다. 고통은 연약함의 결과이나 고통을 이기려는 의지는 새로운 삶을 향한 바람이다. 이러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절망을 잉태하고 절망은 체념을 낳는다. 운동하는 의식으로서의 체념은 삶에의 의지를 중단하는 체념과 달리 지속적 고통 가운데 영원한 존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록 고통 속에 있으나 그 가운데서 영원자를 발견할 때 고통은 은혜로 반전된다. 연약한 마음 가운데 영원자가 함께 한다는 깨우침은 강한 마음과 감사로 이어진다. 이것은 고통과 연약함으로부터 강함으로 나아가는 체념의 운동이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며 아무것도 붙잡지 않으려는 멍때리기도 아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깨어있을 때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연약함과 강함의 만남이다. 절망의 절망은 체념의 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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