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원리, 상호전달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2년 09월 29일(목) 17:07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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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론' 초판

한국교회에 염려가 많다. 교회의 성장은커녕 현상 유지도 어려우며 출석하는 교인이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이 팽배해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적지 않겠지만 이전부터 이러한 현상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구성 원리와 그 본래적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공동체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이루어진다면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교회공동체는 교회법의 산물이 아니다. 교회공동체는 영적 감동을 소유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영적 감동은 문자나 책의 영향과 달리 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마음의 감동을 전달하려는 인간적 욕구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 감동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가 전달한 감동을 다른 사람이 수용한다면 나와 그 사람 간의 첫 번째 관계가 형성된다. 전달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를 제3의 개인에게 재차 전달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교리와 제도라는 형식적 틀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교회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상호전달'로 규정한다. 상호전달은 감동의 전달과 수용에서 이루어진다.

종교적 전달은 마음의 감동을 전제한다. 아무런 감동이 없는 전달은 이를 받아들일 사람을 확보할 수 없다. 전달의 자격은 신학교 교육이라기보다 그때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영적 감동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영적 감동 후 전달할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직자는 영적 체험을 들으려는 청중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평신도는 전달할 내용이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두 직분의 구별은 제도적 구별이 아니라 영적 체험과 감동의 소유에 따른 구별이다. 신학교육과 신학지식은 당연히 중요하나 실질적인 전달과 감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호전달은 수평적이다. 여기에는 전달자의 권위보다 전달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 전달이 감동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달 이전에 각각으로 존재하던 개인은 전달과 수용을 통해 신앙의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신앙의 유대관계는 신앙공동체로 이어진다. 신앙의 유대는 정치적 유대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천상의 유대이다. 신앙공동체는 하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지상의 사회정치적 유대와 다르다. 사회정치적 유대의 주체는 유한한 개인이지만 신앙적 유대의 주체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개인이다. 상호전달이 만들어내는 신앙공동체는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관계하는 개인들 간의 수평적 관계이다. 따라서 상호전달의 공동체는 지상에서 체험하는 천상의 공동체이다.

많은 공동체는 상호전달보다 일방적 전달을 선호한다. 전달자는 한 사람이고 다수의 청중은 한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한다. 여기서 상호전달의 기회는 아예 없으며 일방적 전달에 대해 아멘을 요구받을 뿐이다. 주로 대형 교회가 일방적 전달을 선호하지만, 나머지 교회도 이러한 방식을 흉내 내려고 한다. 일방적 전달에서 말씀의 권위가 세워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형 교회에는 종교(신앙)를 찾는 사람이 많다면 소규모 교회에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많다. 찾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다. 감동과 체험에 따른 확신이 있으면 신앙을 소유한 것이고, 확신은 없으나 관심이 있으면 신앙을 찾는 것이다. 신앙을 찾는 사람이 많은 대형 교회는 이들을 신앙 소유자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일방적 전달에 의존하는 한 이 일은 쉽지 않다. 상호전달과 소통이 없는 곳에서는 예기치 않은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교회의 비리와 세상 부끄러운 일들은 대체로 일방적 전달에서 나온다. 이와 달리 상호전달과 소통이 원활한 곳에서는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으며 발생하는 문제도 쉽게 해결한다.

상호전달은 전달자와 수용자를 결속한다. 양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개체에서 공동체로 나아간다. 결속에서 나오는 존중과 사랑은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와 달리 일방적 전달에 익숙한 공동체에서 진정한 생명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일방적 전달은 대체로 명령의 형태를 띠기에 이런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이다. 굳어진 제도를 핑계 삼아 상호전달의 장(場)을 축소하거나 아예 일방적 전달에 의존하는 교회는 본래의 모습을 망각한 공동체이다. 이런 교회는 현실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변화된 시대를 따라가기에도 벅찰 것이다. 전통의 제도와 관례를 내세우면서 회중을 존중하지 않는 공동체, 몇 사람이 교회의 모든 결정을 독점하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에서 사랑과 생명을 발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 이러한 모습의 한국 교회가 중세적이라면 200년 전에 등장한 상호전달의 원리는 21세기적이다.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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