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무릅쓴 공중제비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2년 08월 31일(수) 16:15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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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

'salto mortale'. 이 말은 치명적 결과가 따를 수 있는 위험한 도약 또는 죽음을 무릅쓴 공중제비를 뜻한다. 누구나 인생의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가 있다. 위험을 감수한 결단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의 통로가 될 수 있으나 이로 인해 안정적 삶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래도 위험한 도약은 일상의 틀을 벗어나게 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철학자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앎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 너머에 도덕적으로(종교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당위가 있다. 아는 것과 행동해야 하는 것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분열이다. 앎의 영역을 유한성에서 무한성으로 넓힐 수 있다면 이 간격은 사라진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욕은 무한한 앎을 쟁취하려고 한다. 레싱(G. E. Lessing) 같은 철학자는 무한한 앎을 전일성(全一性, all-unity)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신이 만물을 창조하는 과정, 만물이 신과 관계 맺는 모습을 개념으로 파악하면 전체존재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만물의 근원인 하나의 존재(一者)와 이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존재자(多者) 간의 관계를 빈틈없이 파악한다면 인간의 지식욕은 충족된다. 만약 전체존재를 개념의 그릇에 담을 수 있다면 그 철학은 최고의 철학이 될 것이다. 신학 체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전일성을 통해 과연 전체존재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야코비(F. H. Jacobi, 1743~1819)는 '스피노자 학설'에서 'salto mortale'라는 말로 이 물음에 답한다. 그는 전일성의 체계에서 공중제비를 감행함으로써 지식의 차원에서 빠져나와 신에게 나아가는 제3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앎이 아닌 믿음의 길이며 사고가 아닌 감정의 길이고 신의 인격성을 향한 길이다. 신은 만물의 이론적 근거가 아니라 운동하는 원인이다. 만물의 원인은 생명 없는 개념이 아니라 살아서 영향을 미치는 인격성이다. 만물의 시작이자 완성인 신의 인격성은 일자에서 다자로 이어지는 개념의 연쇄가 아니라 생명을 지닌 활동성이다. 이렇게 운동하는 신의 인격성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동반하고 섭리한다.

신에게 나아가는 제3의 길은 신을 개념으로 설명하는 사상을 비판한다. 이를테면 스피노자(B. Spinoza)의 실체는 제일 원인자로서 모든 인과관계의 출발점이다. 제일 원인에서 나오는 첫 번째 결과, 이 결과에 뒤따르는 두 번째 결과와 같이 만물은 제일 원인자와 필연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숙명론(fatalism)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코비는 위험한 공중제비를 감행한다. 숙명론을 뒤집을 때 자유론이 탄생한다. 실체가 아닌 인격성으로서의 신은 자유의 근원이므로 그에게서 나온 인간 역시 자유롭다.

신을 느끼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다. 믿음은 내 생각과 무관한 독립적 존재가 내 생각 바깥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막연한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나 밖에 실재하는 존재에 대한 인격적 인정이다. 따라서 인간 인격의 됨됨이는 생각에 앞서 신을 느끼며 그의 존재를 믿는 데 근거한다. 인격은 신에게 도달하려는 생각의 자발성이라기보다 생각에 앞서 신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수동성이다. 믿음은 만물을 지식에 담으려는 오만한 욕구를 물리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나 밖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절대자를 느끼고 그를 믿는 인격적 활동은 정신과 영(靈)의 운동을 펼치며 이 운동에서 신을 만난다. 이것은 신의 인격과 인간 인격의 만남이며 신의 정신과 인간 정신의 만남이다. 정신과 정신의 만남은 동시에 영과 영의 만남이다. 신의 영과 인간의 영의 인격적 만남에는 항상 감동이 있으며 감동은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신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 무한한 영과 유한한 영의 만남에서 새로운 생명과 변화된 삶이 나온다. 인격적 만남을 통해 매너리즘에 빠진 믿음은 새로운 믿음으로 바뀐다.

위험을 무릅쓴 공중제비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이것은 내가 나의 삶을 만든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나의 존재보다 신을 먼저 인정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신에 대한 감정과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쓴 공중제비에서 개인적인 인격성이 발생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인간 일반에서 벗어나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태어난다. 이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고유성이다. 개인적 인격성은 지극히 개성적이며 특유하다. 나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인격과 판단의 주인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다른 믿음의 빛깔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러나 위험한 도약을 감행하지 않으면 기존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주입한 인격을 나의 인격으로 착각하고 심지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신의 인격이라고 우기는 것도 분별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쓴 공중제비에서 나온 믿음은 자신을 에워싼 온갖 틀을 벗어나 홀로 하나님과 교섭하는 인격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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