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7~10대 회장 역임한 김마리아
[ 선교여성과 교회 ]
작성 : 2021년 05월 17일(월) 17:33 가+가-
김마리아 리더십 소고 ⑦

1934년 9월 5~7일 평양 고등여성경학교에서 열린 장로회여전도회연합대회 제7회 총회. /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공.

1932년 7월 마침내 김마리아는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형의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캐나다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귀국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여전했기 때문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는 못했다. 귀국 후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원에서 성경과목 특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며 여성들에게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을 실행했다.

김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원의 교수로 부임했는지에 대해서 현재까지는 김영삼의 글과 김마리아의 고모 김필례의 회고를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다. 그들에 따르면 귀국 1년 전 김마리아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대회에 참가했다가 안식년으로 이 대회에 참석한 마르다윌슨 여자신학원 설립자인 내한 캐나다장로교 여선교사 루이스 맥컬리(Louise H. McCully)를 만났고 이를 인연으로 귀국 후 그곳에 교수로 부임하게 됐다.

맥컬리 선교사는 원산지역 부인회전도회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여성들의 신앙운동과 교회에서의 활동을 강화했다. 이를 계기로 김마리아는 1934년 9월 장로회여전도회연합대회 총회에서 제7대 회장으로 선임돼 이 회를 이끌어 가게 됐다.

조선예수교장로회부인전도회는 1898년 평양 널다리골 부인전도회의 조직을 시작으로 1928년 전국조직으로 발전되기까지 꾸준히 지방에서 조직되고, 지역별로 연합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방 조직과 지역 연합회가 1928년 9월 9일 대구 신정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조직을 승인함에 따라 원산에서 활동하던 캐나다 파송선교사 "리류의"(루이스 맥컬리)를 초대회장으로 하여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연합대회가 창립됐다.

당시 참가한 지방연합회는 모두 11개의 연합회였다. 김마리아는 1934~1938년까지 7~10대 회장으로 여전도회연합대회를 이끌어 나갔으며, 1939년에는 부회장으로 이 회를 섬겼다. 운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원의 설립자인 루이스 맥컬리 즉 '리류의'가 초대회장으로 선임돼 활동한 것, 그리고 고모인 김필례가 김마리아가 회장으로 선임되기 전해인 1933년 회장단으로 여전도회연합대회를 지도한 인연도 이후 김마리아가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김마리아가 7~10대까지 여전도회연합대회를 이끌어 나갈 때 조직은 전국조직으로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승인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크게 확대 발전하게 됐다. 1933년 총회에서 20여개의 지역연합회가 1934년 이후 50개로 확대됐고, 1936년 김마리아가 9대회장으로 이 회를 이끌어 나갈 때에는 무려 59명의 지역연합 총대가 총회에 참여했다.

이때 전국 지회수 1만 971곳, 회원수 2만 7401명, 해외 선교도 상동성, 남만주, 북만주로 학대됐고, 선교비 예산 총액이 2900원이 됐다. 주선애의 표현대로 여전도회의 '전성기'였다.

또한 김마리아가 10대 회장으로 활동하던 1937년, 장로회총회에서 매년 1월 셋째 주를 '여전도회 주일'로 제정한 것도 이 조직의 위상과 활동을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여 년 이상의 망명생활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전무한 김마리아였지만, 그의 지도력은 여전히 유효했을 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조직은 확대 발전했으며 활동은 역동성을 갖게 됐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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