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신의 음성 순종위해 잠시 정지(?)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4월 13일(화) 13:33 가+가-
12. 창세기 22장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1) 엠마뉘엘 레비나스

렘브란트(Rembrandt) 작 '이삭의 희생(Sacrifice of Isaac, 1635)'.

단테의 신곡에 이어 창세기 22장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세 명의 철학자들을 다루려 한다. 먼저 20세기 타자윤리로 큰 영향을 끼친 엠마뉘엘 레비나스(Emmauel Levinas)와 동시대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마지막으로 19세기 실존철학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를 다룬다. 이 세 사람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믿음의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3번에 걸쳐 연재한다.


하나님의 명령 vs 양심의 소리

레비나스는 아브라함이 신의 음성에 순종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의 음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라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창세기 2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아들 살해는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이러한 비윤리적 행위를 감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동기는 바로 신의 음성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와 아들 이삭에게 여행의 목적(아들 살해)을 밝히지 않고 침묵 가운데 그 명령을 수행하려고 한다. 결국 아브라함의 내러티브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사건임이 드러난다.

레비나스는 아브라함이 타자(여기서는 자신의 아들)를 향해 신의 음성에 순종하여 칼을 들려했던 행위 자체에 문제점을 지적한다. 아브라함이 칼을 드는 순간 그는 세상의 윤리와 의무와 책임을 초월하여 오직 신 앞에 서 있는 절대적 의무만을 체험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선 순간은 신을 향한 믿음의 유일성만이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윤리를 초월하는 신앙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세운다.


윤리는 제일철학이다

레비나스에겐 윤리적 의무란 가장 근원적인 명령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종교의 이름으로 윤리적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레비나스가 윤리야말로 어떤 사상, 종교보다도 앞서는 '제일철학'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리가 멈춘 순간 아들 살해의 시도로 바로 이어졌으며 이는 레비나스에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레비나스는 아들 살해를 명령한 신과 이러한 비윤리적 명령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비록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살인을 행하지 않았지만 그는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했으며 이러한 살인미수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주체에게 부여된 지나친 관대함이다. 레비나스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 타자에 그 우선성을 부여한다. 타자는 하늘의 명령을 받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귀 기울여야 했던 첫 번째 음성은 신의 음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들어야 하는 음성은 타자에 대한 책임의 음성인 윤리적 음성이며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다.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삼는 레비나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타자윤리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명령에만 집중하여 해석하면 자아는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얼마든지 타자를 사유화하는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런 정당화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악'(evil)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윤리적 음성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라는 하나님의 '사자'(angel)의 음성이다. 레비나스는 이 천사의 음성을 양심의 음성, 윤리적 음성으로 해석한다. 만약 아브라함이 윤리적 음성에 귀 기울여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했다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장 윤리적인 드라마이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려 한 첫 번째 음성, '아들을 바치라'는 신의 명령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의 음성을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이 아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애쓰며 순종한다. 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르려는 순간, 다시 그에게 신의 음성이 들려온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는 순간이다. 이 마지막 순간은 앎과 실천, 신앙과 윤리가 하나되는 순간이다.


타자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아브라함이 당한 고초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철학의 전통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요구를 무시하고 전체적인 획일성에 통합하려는 폭력의 역사이다.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다름 아닌 이러한 폭력적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폭력적 형이상학의 거대한 힘을 레비나스는 타자를 '동일자'(the same)로 흡수해버리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기획임을 고발한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요구를 무시하고 타자에게 거침없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든 힘을 고발하는 것이다. 자아(the self)는 오랫동안 서구철학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적 사고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자아 혹은 주체가 아니라 폭력적인 힘 아래 눌려있는 타자 안에서 새로운 도덕지식의 근원을 찾고자 함을 역설한다. 레비나스는 올바른 자아를 발견하는 길도 타자에 있음을 역설한다.

레비나스에게 유한과 무한의 연결고리는 타자를 위한 '윤리적 책임'이다. 신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요 무한과 유한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타자를 위한 책임의 윤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타자를 위한 희생과 책임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던짐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 '나'라는 주체는 온전해지고 완성될 수 있다. 유대인 철학자로서 레비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케노시스, 십자가의 대속은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이점에서 설교자의 신학적 해석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본문 해석이지만 '타자윤리'를 향한 그의 외침은 승자 독식, 약육강식의 현대 사회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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