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읽기 3: 지옥의 문에 이르다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3월 18일(목) 10:31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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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뎅의 생각하는사람.(단테 지옥문을 소재로 지옥문 상단에 고난받는 인간을 바라보고 상념에 잠겨 있는 단테)

단테가 어두운 숲에서 헤매고 있을 때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길을 떠난다. 지옥의 문에 이르는 길은 급경사이고 내리막길로 초목이 아주 우거져 매우 걷기 힘든 길이다. 요즘엔 등산로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서 제법 높은 산도 그리 어렵지 않게 산보 하듯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지옥을 향한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버려진 길이다. 길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다닌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망자(亡者)만이 다니는 곳을 단테가 걸어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단테가 지옥의 문을 이 세상의 끝에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저 피안의 세계 바닥에 있는 지옥이 아니다. 길을 잃고 헤맨 숲에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숲속 끝자락에 지옥의 문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지옥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가고,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괴로움으로 가며,
나를 지나는 사람은 멸망의 족속에 이를지니


정의의 창조주께서 움직이시어
당신의 권능과 지극한 지혜와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노라.


나보다 먼저 창조된 것은 영원 밖에 없으니
나는 여기에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편(제3곡), 1-9'


지옥문이 스스로 '나'라는 화자가 되어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지옥문은 단순한 출구일 뿐만 아니라 지옥 전체를 포괄하는 상징적인 묘사이다. 지옥은 희망을 버려야 들어가는 곳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진단하면서 '절망은 죄인가?'라고 물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키에르케고르가 '신곡' 지옥편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살면서 고통 중에 낙심하고 절망하는 일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오늘을 희망 없이 살면 지옥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절망하여 지옥문에 이르기 전까지 다시 힘을 내야 한다. 단테가 그리는 지옥의 소재는 저 깊은 무저갱 한없이 추락하는 지하 바닥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라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통찰이다. 지옥문이 그려주는 내부의 모습은 슬픔(dolente)과 영원한 고통(eterno dolore)과 수많은 길 잃은 영혼들(la perduta gente)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리라'는 표현은 성도에게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준다. 희망은 단순한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성도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존재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단테의 말로 표현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희망은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주는 생명선이며 이 생명선이 끊어지면 지옥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단테가 왜 지옥문을 '나'라는 일인칭 화자로 묘사했을까? 몇 번을 지옥문에 새긴 글귀를 읽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문의 '나'가 마치 나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목사라고 하면서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면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 때문에 희망을 잃은 사람은 혹시 있지 않았을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말만 해도 모자란 절망 가득 찬 세상에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좌절한 사람은 없는지? 나의 부주의한 말로 남을 절망시켰다면 타자를 지옥문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한 죄를 어떻게 씻어야 할까?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주변의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가 자문해본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죽음의 희망조차 지니지 못한 이들"'지옥편(제3곡), 46행'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자살 선진국 중의 하나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시도가 '죽음의 희망'인 것이다. 하지만 지옥에 사는 사람은 이런 '죽음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리라!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의 부친이 요양 병원에 계실 때가 떠올랐다. 의료진은 최선을 다했지만 가족들 입장에서 의식도 없이 그저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오랫동안 연명치료를 받아오신 은퇴 장로님의 임종을 앞두고 병원에 갔다. 장로님의 큰 아들, 주치의, 목회자인 필자 셋이서 연명치료 중단을 놓고 의논을 했다. 의학적으로 뇌사상태로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하고 환자나 가족을 위해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장로님의 가족들은 필자에게 마지막 임종예배를 부탁하고 은혜로운 천국 환송을 치를 수 있었다.


지옥이 '죽음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곳이라면 성도에게 죽음은 영생에 이르는 문이며 부활의 소망이다.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옥편'의 입구까지만 독자들을 인도하려고 한다. 더 깊은 지옥의 세계는 독자들이 직접 읽어주기를 바란다. 다음 회 우리 개신교에는 생소한 부분인 '연옥편'을 다루어보자.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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