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읽기 2 : 어두운 숲을 헤매다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3월 16일(화) 14:48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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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마틴 루터가 '독일어성경'을 번역했다는 점을 든다. 루터보다 조금 이른 단테의 '신곡' 초판은 1472년에 빛을 보게 된다. 이 무렵 서유럽은 라틴어 중심의 단일 언어와 문화가 민족과 지역별로 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각자의 민족 언어를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단테도 이런 영향 속에서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 이탈리아어로 기록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영어공부도 해야 하지만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국어'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단테 지옥편의 첫 시작이다.

"한평생 나그네 반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던 나 컴컴한 숲 속에 서 있었노라."

"한평생 나그네 반고비"를 직역하면 '우리 생명의 길 한가운데'(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라는 말의 의미이다. 쉽게 말해 한창 절정에 이른 나이를 뜻한다. 시편 말씀처럼 "우리 연수가 칠십, 강건해야 팔십"(시 90:10)이라면 35세에서 40 정도에 이른 나이다. 예수도 한 창 나이를 앞둔 33세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단테 자신도 35세가 된 1300년경에 피렌체의 장관직에 오르게 되니 인생의 가장 꽃피는 시기요 모든 것이 잘 풀리는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문제는 인생의 절정에 이른 순간 찾아온다. 꽃피는 어느 봄날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운 숲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아주 깊은 첩첩산중에서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가? 문제는 그런 숲에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려왔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이다.

신앙의 첫 출발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인생길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자각이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모두가 "당신이 그 자리에 있으니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라고 칭찬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인생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발견한 것이다.

단테가 말하는 올바른 길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와 믿음의 길이다. 이 옳은 길을 떠난 모든 인생들은 결국 지옥의 문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단테가 이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시적이고 인간적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의학적 강요나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적 언어가 지닌 숨겨진 메타포는 어떤 교리보다도 더 큰 울림을 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방황하고, 괴로워한다. 이루지 못할 것을 향해 기대하고 매달리다가 실패하여 좌절한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고 다시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허나 공포가 내 마음을 찌르던 골짜기가 끝나는 곳, 어느 산기슭에 다다라,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이미 그 너머에는 온갖 길에 있는 자를 올바로 인도하는 유성의 빛이 휘감겨 있었노라."

성경뿐만 아니라 '신곡'에서도 빛은 소망이요 희망이다. 밤새 엄습한 두려움이 마침내 빛으로 사라진다. 연구자들은 '유성의 빛'은 당시 급속한 발전을 이룬 프톨레마이어스의 천문학을 따라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잃은 사람, 난파당한 배에 탄 선원처럼 무기력한 사람에게 비친 한 줄기 태양 빛은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는 계기이다. 빛이 비추자 단테는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을 뒤돌아본다.

"오로지 도망치고만 싶어 하는 내 혼(魂)은 살아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는 지나쳐 온 황량한 그곳을 돌아보았노라.""

'돌아본다'는 것. 아주 중요한 반성(反省)이 시작된 순간이다. 반성이 없으면 돌이킴은 불가능하다. 정신없이 달려오다 길을 잃었는데 이제야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지난날의 과오가 떠오른다. 시인은 길을 잃게 된 숲속, 세상의 유혹들을 암표범과 사자와 늑대로 상징화한다. 각각 성적 유혹, 권력의 유혹, 식욕을 가리킨다. 이 중 가장 큰 유혹은 마지막 늑대였다. 나이 서른 다섯에 어느 정도 색욕(표범)은 분별하고 자제할 수 있다. 권력욕(사자)도 높은 자리에 이미 올라보니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했다. 하지만 모든 욕망의 근원인 식욕(늑대)은 도무지 자신에게서 떠나갈 줄 몰랐다. 사탄의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도 '식욕'에 관한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위기의 순간 늑대에 잡혀 길을 잃고 모든 유혹에 무너지려는 순간 단테에게 나타난 사람이 베르길리우스이다. 단테는 천국을 향해 나서는 영적 순례에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내세운다.
방황하는 영혼 앞에 나타난 베르길리우스. 길을 잃은 사람에게 안내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또 있을까? 단테도 그의 등장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시인, 로마의 건국 신화를 지은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궁금해하는 단테에게 시인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부탁으로 너에게 왔노라...그런데 어찌 당신은 그리도 용기도 없느냐...어찌 두려워하느냐."

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안위를 염려하여 시인을 보낸 것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적임자인 이유는 유혹에 빠져 길을 잃은 단테에게 시인의 정제된 언어 이상 좋은 길잡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힘찬 말과 그를 살려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천상에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베아트리체의 전령을 만난 후 단테는 다시 용기와 힘을 얻는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길을 잃은 사람들의 종착지인 지옥을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는가? 천국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사랑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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