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 시인의눈으로본세상 ]
작성 : 2021년 03월 10일(수) 10:00 가+가-
식사자리였다. 그날 처음 뵙는 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고향이 비슷한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급속도로 말이 많아졌다. 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영월이다. 태백산맥 서쪽의 강원도 영서지역은 대부분 같은 생활권으로 묶여 있다. 오지인 만큼 같은 지역민들끼리의 애착심도 크다. 같은 고향이라는 인연은 큰 연대감을 준다. 나 또한 마치 고향 형님을 만난 듯 반가웠다.

사실 이런 얘기는 흔하고 오래된 일이다. 백석의 시 '고향'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등장한다. 시인 백석은 먼 타향에서 병이 걸린다. 동네 의원이 백석을 진찰하다가 느닷없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백석은 평안도 정주라고 말한다. 의원은 그곳은 아무개씨 고향이라고 하고, 백석은 아무개씨를 아느냐고 묻는다. 백석은 아무개씨를 아버지처럼 섬긴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백석과 의원은 서로 웃고, 의원의 손길이 따뜻하고 부드럽다고 느낀다. 이후로 이들의 관계가 어찌 될지는 안 봐도 훤하다. 백석은 의원을 통해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고 말한다. 이 시는 1930년대의 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몇 가지 수순이 있다. 다 아시다시피 지연, 학연, 혈연, 초면의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 어디 학교 출신이냐, 본관이 어디냐를 서로 탐색한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공통점이 있으면 급속히 친해지고 서로를 같은 관계로 묶는다. 이런 일이 나쁜 것은 아니다. 비슷한 공간에서 나고 자랐다는 공감대가 서로를 묶어주는 큰 매개체가 되기도 하며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지연, 학연, 혈연으로 패거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서로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지연은 서로를 일치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인연이 된다. 지연은 우리의 관계가 운명이라는 말과도 동일시된다. 고향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타고난 것이다. 그래서 고향 친구, 고향 선후배, 고향 형님과 아우가 생기고 때론 삼촌, 아제, 조카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겠지만 누구나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런 경우이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지만 지금 영월에는 나를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찍이 그곳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떠나왔으니까. 그 후로 나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는 교편을 잡으시다가 평생 시골에서 목회를 하셨다. 강원도 영월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횡성, 인제, 충북 제천, 경북 김천, 상주, 점촌, 충남 논산, 초등학교까지는 줄곧 강원도에서 자랐다. 이후로는 몇 년에 한 번씩 옮겨 다녔다. 가장 오래 산 곳은 충남 논산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은 논산과 대전에서 사신다.

30년 넘게 논산에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나의 고향은 논산이 아닐 때가 많았다. 몇 년 살지는 않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영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때에 따라 충남 논산을 '연고지'라고 쓴다. 고향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고향이 여러 개여야만 한다. 태어난 고향, 유년의 고향, 사춘기의 고향, 오랫동안 품고 성장한 고향. 고향을 여러 개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충북 옥천이 고향인 정지용 시인은 '고향'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오랜만에 가본 고향은 낯설다. 낯선 이유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선이 아닌 어른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향의 하늘과 땅과 물은 변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저마다 고향을 노래한다. 고향은 사람의 기억이다. 잊힌 마음속의 사람이 피어나는 곳이다. 사람과 나누었던 모든 시간들이 다시 재생하는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 가본지 오래 되었다. 내 최초의 시간이 고여 있는 땅. 부모님이 신혼생활을 하신 곳. 어머니가 가끔씩 그리워하셨던 곳. 봄꽃이 피면 그곳에 부모님을 모시고 꼭 가보고 싶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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