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주의와 사도 바울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2월 02일(화) 08:38 가+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울증, 정서적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국인 미국은 covid-19로 인한 스트레스로 마음 수양 서적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스토아 사상과 관련한 주제들이 여러 분야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논에서 시작하여 세네카,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로마시대 스토아 사상가들의 이름은 한 두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들의 철학이 어떠하기에 전염병이 창궐한 사회에 위안을 던져준 것일까?

스토아주의란?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스토아주의 역사는 대략 500년이나 이어진다. 스토아란 고대 로마건축의 기다란 기둥을 늘어뜨린 주랑(柱廊)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시대에 스토아주의는 급속히 쇠퇴하였지만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 '신스토아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많은 사상들이 명멸(明滅)을 거듭하지만 스토아주의가 이렇게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스토아주의가 지닌 일관성과 삶에 구체적인 적용이 용이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스 철학을 접한 로마인들은 그들의 철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논의라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초월, 일자(一者), 형상(形相) 등 들어도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경험적인 것, 자연에 깃든 현상과 그 원리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토아주의에서 신은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 우주와 세상, 심지어 내 몸 안에 깃든 물질에 기초한 이성적 원리였다. 스토아주의는 내세를 부정하고 이생의 삶만을 인정한다. 따라서 스토아주의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는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내 삶의 행복지수를 극대화하는 노력이었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엄밀히 구분한다.

왜 태어났는지, 악은 왜 넘쳐나는지, 오늘 날씨는 왜 이리 추운지 등의 질문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다. 더 나아가 가난, 질병, 심지어 죽음조차도 나의 의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에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죽음은 자연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겪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죽음을 회피하거나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할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논의로 내 귀한 시간을 빼앗기는 것보다 지금 남아있는 하루를 즐기는 것이 바른 삶의 태도이다.

내면의 평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외부에서부터 오는 불행과 이로 인한 감정의 변화(주로 분노)이다. 1세기 대표적 스토아학파의 세네카는 분노의 감정과 외부의 불행을 견디는 힘을 의연함(eupatheia)이라고 했다. 의연함을 키우기 위한 중요한 덕목으로 지혜, 정의, 용기와 자기절제 등을 꼽았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요가, 명상, 마음 다스리기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그 사상적 바탕에는 스토이시즘이 흐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고 스토아주의가 자아에 갇혀 유아론(唯我論)에 빠진 것은 아니다. 로마라는 거대제국은 마음 수양에 몰두하는 개인들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없었다. 세네카는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선행을 주장한다. 선행은 일종의 사회 의무였기에 누군가에게 베푼 자선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호의요 정성스런 마음이다. 베푼 자의 호의에 답례를 하는 것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시민의 핵심 덕목이다. 따라서 선물을 주기 전에 합당한 감사로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제대로 답례하는 사람이야말로 도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스토아학파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스토아주의가 로마의 지성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울은 스토아사상가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생에서 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스토아주의의 삶의 모토는 나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태도였다. 또한 받은 것이 있다면 적절하게 돌려주는 호혜(互惠)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제국에 적합한 시민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주류인 스토아주의에 아주 낯선 은혜를 가르치고 실천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란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주어진 선물이었다. 이는 세상의 선물교환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다.

스토아 사상가들과 가장 열띤 논쟁은 역시 죽음에 대한 주제였으리라(행 17:18). 내세를 인정하지 않은 스토아주의에 물든 사람들에게 바울은 죽음 이후의 삶을 역설한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선포한 바울의 복음은 많은 로마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온 성은 소동하였다(행 21장). 박해에도 불구하고 소수 중의 소수였던 기독교는 약 300여년 후 로마의 공인 종교(AD 313)가 되고 그 후로 스토이시즘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근대 철학자인 라이프니츠는 이 놀라운 반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준다. "스토아주의는 희망 없는 인내이다." 삶에 대한 체념적 태도, 고통과 감정을 배제한 '의연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들에게 스토아주의는 길을 제시할 수 없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사회의 모든 관계가 주고받기(give&take)로 환원되는 현실을 보아도 오늘날 스토아주의는 아직 건재한 듯하다. 더욱이 불가피한 고통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행복을 극대화하는 스토아적 삶의 태도는 covid-19 세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만약 바울이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로마제국보다 더 스토아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다시 그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또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선물로 주신 예수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삶만이 참된 복임을.

청중도 몇 안 되는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이 외친 좋은 소식은 "예수와 부활"이 전부였다. 그가 뿌린 씨앗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나무로 자라 로마라는 거대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바꾸었다. 오늘 우리가 뿌리는 복음의 씨앗은 과연 무엇일까?

박원빈 목사(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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