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에서 세상보기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1월 26일(화) 08:50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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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 더 큰 문제는 나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착각이다. 아무리 오래전이라도 '착한 행동'은 지금의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반면 얼마 지나지 않았어도 내가 한 '나쁜 행동'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렵사리 기억했다 한들 그때와 달리 나는 더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고 여긴다. 자아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있어 맥락(시간과 공간)과 타자와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외부의 정보를 재구성할 뿐이다. 고속도로에서 내가 모는 차보다 천천히 모는 운전자는 '바보'이고 나보다 빨리 달리면 '미친' 사람이다. 악은 넘쳐나지만 악을 행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수님도 이런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동굴의 비유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 막바지에 이상적이라 여긴 도시국가 아테네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보고 절망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유명한 '동굴의 비유'이다.

죄수들은 사슬에 묶여 동굴 벽만을 볼 수 있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는 옆 사람은 물론 나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그들이 보는 전부는 동굴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뿐, 그림자를 실재라고 착각한다. 그림자는 동굴 중앙에 놓인 횃불 때문에 생긴 것으로 죄수들은 가끔씩 오가는 간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죄수 중에 한 사람이 사슬에서 풀려난다면 어떻게 될까? 죄수는 두려움에 쌓여 몸을 돌릴 때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의 밝음에 큰 고통을 느낀다. 죄수는 동굴의 불빛 뒤에 더 밝게 빛나는 가느다란 햇빛을 발견하고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향해 올라간다. 마침내 동굴 밖에서 처음 보는 나무, 풀, 온갖 꽃들과 새와 바람 소리를 듣게 된다. 죄수는 이전까지 자신이 동굴에서 본 것은 그림자였고 허상을 통한 생각, 행동들이 잘못임을 깨닫는다.

밝은 태양이 있는 세상에서 죄수는 다시 동굴로 내려간다. 아직 동굴에 갇힌 동료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태양 아래 있던 죄수는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처럼 잠시 시력을 잃게 된다. 빛을 본 죄수만이 경험하는 내면의 고통이다. 내적 고통을 무릅쓰고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태양이 비치는 밝은 세상이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 죄수에게 화를 내며 동굴 세상을 파괴하는 죄수를 오히려 죽이려 든다.



편견의 사각지대

플라톤은 비유를 통해 아테네 시민의 무지로 인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암시한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래서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을 교정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의 기능이다. 교육의 첫 출발은 몸을 돌려 그림자가 아닌 진상(眞相)을 보는 것이다. 참된 앎을 향한 플라톤의 교육관은 오늘날 우리의 교육과는 사뭇 다르다. 대학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대학 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무런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화려한 스펙을 갖추고도 방황하는 젊은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는 이유이다.

플라톤에게 앎의 시작은 무지의 원인이 되는 기만적인 그림자의 세계와 결별하는 것이다. 당시 교육은 단순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소피스트식 교육이었다. 플라톤이 내세운 교육의 목표는 덕(德, arete)의 함양이다. 문제는 덕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요 훈련으로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덕은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아는 자만이 평생에 거쳐 상기(想起, anamnesis)할 뿐이다. 플라톤은 이를 영혼의 전회(conversion)라고 했다. 기독교의 회개와 유사한 전회의 개념을 플라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혼의 눈은 이미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전회는 영혼의 눈에 시력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향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자의 세계는 늘 변한다. 빛의 각도, 태양의 높낮이에 따라 그림자는 춤을 춘다. 그림자가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사물의 변화에만 몰두하여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참된 앎은 삼라만상의 변화를 초월하여 그 배후에 있는 이성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티마이오스'에서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에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는 신(데미우르고스)과 신의 질서로 표현되는 수학이었다.

심리학에서 자신이 편견에 빠져있음을 보지 못하는 현상을 편견의 사각지대라고 한다. 좌우대립의 진영논리, 끊임없는 다툼과 갈등 속에서 빛의 자녀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마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좁고 울퉁불퉁한 암흑의 동굴에서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누가 구할 것인가?

박원빈 목사(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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