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소명과 확신 사이에서
[ 땅끝편지 ]
작성 : 2021년 01월 14일(목) 10:48 가+가-
체코 이종실 선교사1

2005년 체코형제복음교단의 신입 목사 환영식에 참석한 필자(우측에서 두번째).

선교사의 길은 세속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더구나 그의 대속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니 의심의 싹을 틔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후 분명해 보였던 결심들이 몇 차례 실현되지 못하면서 '확신'에 대한 의심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귀에 쟁쟁하게 듣고 마음 속에 형용할 수 없는 평화와 충만함이 가득한 체험 속에 소명을 확인해도, 이성으로부터 스멀스멀 의심과 두려움이 끝없이 기어 나온다.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일까?' 아니면 '나의 소원일까?' 이런 형이상학적 갈등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막연해 보이는 소명과 불투명한 가족들의 미래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더구나 선교 소명이 해피엔딩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아도 항상 선교 운동의 동력이 됐던 '소명'이 한계를 드러냈고, 심지어 영국 국교회도 자신들이 파송했던 선교사들이 질병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 대다수의 소명과 활동이 복음과 서구 문화를 분별하지 못한 채 잘못되게 진행된 부분들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선교사의 길은 '선교의 진보를 위해 인간과 그 신학의 한계를 증명하게 될 실험실 쥐'와 비슷한 처지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본격적으로 해외 선교에 시동을 건 한국교회의 시행착오는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여서, 그것이 언젠가는 선교사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 명약관화했다.

'왜 내가 생소한 사회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이 의문을 가진 때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하나의 국가였다. 필자가 체코에 입국한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분리됐다.) 선교사이어야 하는가?' 총회 전도부 국제선교위원회가 총회 세계선교부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부서의 마지막 간사이자 첫 간사로서 주어진 모든 책임을 감당하고, 영국 버밍햄 셀리오크칼리지 기숙사에서 그 질문에 대한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려야 했다. 결국 소명의 확신에 대한 오차의 한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이성적 판단에 나의 인생을 걸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 파송을 기다릴 수 있을까?'와 "선교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두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면 선교사의 길에서 뒤돌아서기로 마음 먹었다.

알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사랑은 '앎'에서 출발한다. 20세기 말 해외 선교 지형은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정보가 넘쳐나는 20세기 말과 21세기는 선교 현지를 알기 위해 리빙스턴처럼 위험한 탐험을 할 필요가 없다. 19세기 선교사들 덕분에 개종자들에 의해 전 세계에 교회가 세워졌고, 선교의 방향은 기독교 국가에서 비기독교 국가가 아닌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향하고 있다. 선교 현지에서 선교사가 제일 먼저 알고 배워야 할 우선순위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현지 교회'이다. 그들의 복음 수용 역사, 기독교 문화 형성, 교리와 전통에 기반을 둔 생활 모습, 그들의 기독교 정체성과 그 반작용의 폐쇄성, 그리고 그들이 설정한 선교 과제 등이다. 선교학자 히버트에 따르면 지역 교회는 복음의 해석학적 공동체이다. 선교사는 선교 현지 지역 교회라는 창문을 통해 그 사회를 알아 갈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육대륙 선교 시대'의 축복이다.

이종실 목사 /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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