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의 거리
[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 ]
작성 : 2021년 01월 06일(수) 10:00 가+가-
베란다에 작은 의자 두 개를 놓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당근마켓에서 직거래한 의자다. 의자를 직거래한 곳은 집 근처 상가에 있는 카페였다. 가게를 폐업하게 되어서 의자를 저렴하게 내놓는 것이란다. 의자를 가져오면서 싼 가격에 의자를 구입했다는 마음보다 안타깝고 우울한 심사가 내내 마음을 짓눌렀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의자를 내어놓는 젊은 카페 사장님의 씁쓸함이 눈망울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작은 의자 때문에 매일 햇살을 맞는 호사를 누렸다. 평소에는 늦은 아침 햇살을 집에서 맞는 기회가 없었다. 작은 의자에 어울리는 작은 차탁도 구했다. 우리 집에 이렇게 좋은 햇살이 쏟아지는지 몰랐다. 햇살을 맞으며 아침커피를 천천히 마시는 시간이 참 좋았다. 질퍽한 머릿속이 햇살 때문에 싱그럽게 말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게 코로나 때문에 생긴 여유인 것이다. 코로나가 준 시간이 아니었다면, 코로나가 준 의자가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햇살의 호사는 코로나로 인한 유폐 신세와 폐업이 가져다준 우연과 고통의 선물이다.

코로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걸 바꿔 놓고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요즘처럼 지독한 변화는 없었다. 일주일동안 배달음식으로 연명하며 집밖을 안 나간다거나, 온라인으로 동영상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른다거나, 주일예배를 TV로 드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매일매일 전쟁 중이다. 집은 온라인 학교로 변해 나는 자주 베란다로 피신해야 했다. 중학생이 된 딸은 웹툰에 빠졌고, 전형적인 확찐자가 된 초딩 아들은 게임에 빠졌다. 아내는 무서운 사감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나쁜 아빠가 되었다. 코로나는 "나는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훌륭한 남편은 못 되더라도 꽤 괜찮은 아빠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금세 깨졌다. 잔소리가 많고, 화를 참지 못하고, 기다려주지 못하는 성격이 내게 있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다. 코로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의 민낯을 고통스럽게 감상하는 일까지도 제공해주었다.

베란다에서 차를 마실 때만 의자를 사용하는 건 아니다.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다보니 의자에 많이 앉게 된다. 집안에만 있다 보니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매일 온 세계의 코로나 바이러스 현황을 확인하고 우리나라의 확진자 숫자를 검색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에 대한 찬반논의를 탐색하는 뉴스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불안했다. 의자는 우리에게 일하는 도구이며 잠시 쉬는 도구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의자는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정록 시인은 의자를 위안의 자리라고 했다. "그래도 큰애 네가/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의자')라고 아버지에게 큰애는 힘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위안이었다. 참외에게는 지푸라기가 호박에게는 똬리가 있어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산다는 건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라고 시인은 말했다. 조병화 시인은 "지금 어드메 쯤/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 옵니다./그 분을 위하여/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의자')다고 선구자적 인식을 보여주었다. 시에서 '그 분'은 아침을 몰고 오는 자이다. 지금 우리에게 '아침'은 희망이나 회복과 다름 아니다. 희망과 회복을 위해 애쓰는 모든 자들이 '그 분'일 수가 있다. 애쓴다는 말이 요즘처럼 감동적일 때가 없다.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의자를 비워드려야 한다. 묵은 의자라 하더라도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애쓰는 자들을 위해 나누어야 하는 때다.

올해는 회복과 위안이 가장 중요한 말이지 않을까.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코로나로 망가진 관계와 마음은 회복되어야 한다. 차를 가운데 두고 의자에 앉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조근조근 대화를 할 수 있다.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다. 가족처럼 너무 가까이에서 아등바등했던 관계를 의자의 거리만큼 떨어져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회복과 위안의 가장 큰 도구는 내 의자를 비워주는 것. 잠시 여기 않으라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의자의 거리가 관계를 회복하는 거리이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 이재훈 시인은...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가 있고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딜레마의 시학''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건양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계간'시사사' 주간, 창작반 '상상스콜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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