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신앙이 공존할 수 있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20년 12월 22일(화) 10:22 가+가-
<21>관용 논쟁

1762년 3월 9일, 툴루즈에서 수레바퀴형으로 처형당하는 장 칼라스. 이 사건은 관용논쟁의 도화선이 됐다.

1762년 3월 9일 프랑스 툴루즈에서는 위그노(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일컫는 용어) 장 칼라스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수레바퀴에 매달려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시 당국이 처형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장남인 마르크 앙투안이 가족의 위그노 신앙을 버리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하자 장 칼라스가 아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로마가톨릭 신앙만이 공인됐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불법이었으니 위그노 한 명이 처형당한 일이야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철학자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일명 볼테르(1694~1778)는 이 사건을 계기로 관용 논쟁을 촉발시켰다.

칼라스 사건과 볼테르의 '관용론'

장 칼라스의 처형 소식을 들은 볼테르는 독자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그는 우매한 군중의 종교적 맹신에 판사들의 편견이 더해져 빚어진 부조리한 판결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먼저 68세의 병든 노인이 28세의 청년을 죽인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재판 기록이 말하는 대로 칼라스와 그의 부인, 둘째 아들 피에르, 손님 라베스와 하녀가 공모해 큰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왜 이 일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은 사형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강한 의문이 든다. 칼라스가 큰 아들을 죽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음에도,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힌 군중들이 만든 가짜 뉴스, 즉 위그노 교도인 칼라스가 아들이 로마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유언비어에 휘둘린 판사 13명이 8대 5로 유죄를 선언해 끔찍한 처형을 감행한 것이 이 사건의 실상이다. 실제로 칼라스의 아들 중 한 명인 루이가 이미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한 바 있고, 그 집에서 30년 간 일하고 있던 하녀도 로마가톨릭 교인이었는데도 이런 점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오로지 위그노에 대한 편견과 광기만이 군중과 법원을 움직인 힘이었다.

볼테르는 칼라스 사건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칼라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양심 세력에게 호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볼테르는 '관용론'을 출간해 신앙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들 사이의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결코 서로를 미워하라고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며, 서로를 죽이라고 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도와서 힘들고 덧없는 삶의 짐을 견디도록 해주소서."

로마가톨릭과 위그노의 갈등

칼라스 사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신앙의 갈등을 고려해야 한다. 전통적인 로마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도 16세기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마침내 1559년 수도 파리 한복판에서 프로테스탄트 위그노들이 모여 개혁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하지만 곧 로마가톨릭에 의한 위그노 박해가 시작됐다. 1562년 3월 1일 프랑스 작은 마을 바시에서 헛간에 모여 예배드리던 위그노들을 학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으로 '위그노 사냥'이 확산됐다. 이때부터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기까지 36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친 대규모 위그노 박해가 있었다. 낭트칙령이 가져다 준 불안한 공존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1610년 앙리 4세가 로마가톨릭 동맹 열광주의자 프랑수아 라바이약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 후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점점 고조돼 급기야 루이14세는 1685년 퐁텐블로칙령으로 위그노 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1787년 루이16세가 베르사유칙령을 통해 관용령을 발표하기까지 100여 년을 위그노들은 '광야시대'라 부른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다다르기 전에 광야에서 지냈던 것처럼,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동안 대략 30만 명에 이르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 인근 나라로, 멀리는 아메리카 대륙과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피신하는 '출애굽'이 일어났다. 또한 수많은 위그노가 처형되고 투옥되고 갤리선으로 보내졌다.

장 칼라스 사건은 광야시대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칼라스가 처형당한 1762년 3월은 마침 위그노 학살의 시발점이었던 바시학살 200주년이었기 때문에, 툴루즈를 위시한 프랑스 전역에서 로마가톨릭 신앙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제 분위기에 휩쓸린 군중들은 위그노인 칼라스를 상대로 집단 따돌림을 행했고, 재판관들조차 종교적 맹신과 편견에 사로잡혀 칼라스를 죽이는 데 공모했던 것이다. 볼테르 자신은 비록 로마가톨릭교도였지만 칼라스 사건의 부조리를 묵인할 수 없었기에 '관용론'을 통해 칼라스의 재심 여론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칼라스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765년 5월 9일 그의 무죄와 복권이 선언됐다.

똘레랑스의 두 얼굴

볼테르보다 200여 년 전에 프랑스인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1515~1563)은 1553년 자행된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반대해 '이단에 관하여, 그들을 박해해야만 하는가?'를 펴냈고, 또 볼테르보다 130여 년 후에 '프랑스의 양심' 에밀 졸라(1840~1902)는 1894년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나는 고발한다!(1898)'를 출판했다. 흔히 프랑스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똘레랑스(관용)는 오랜 역사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카스텔리옹, 볼테르, 졸라와 같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앙가주망(engagement: 현실참여)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진전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도전과 질문 앞에 서있다. 관용이 소수자와 약자를 지키는 보루인가, 아니면 강자들의 지배와 억압의 다른 이름인가? 관용이 양심과 자유를 지키는 수단인가, 아니면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도덕을 무력화하는 무기인가? 관용의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우리는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관용의 역설' 앞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누구의 편에 서서 관용을 말하고 있는가, 누구의 유익을 위한 관용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똘레랑스의 빛과 그림자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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