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1~13)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0년 10월 02일(금) 08:47 가+가-
12 종말의 때를 기억하는 슬기로운 신앙생활
죽음의 끝자락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가 있어야 영원하고 거룩한 하늘의 가치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것을 추구하는 부패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마지막에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심판과 함께 천국밖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다. 이 비유의 의미에 대한 해석들은 자료의 출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초기 교회(마태 포함)가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창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는 "깨어 있으라"(13절)라는 비유의 결론과 비유에서 열 처녀 모두가 "졸며 잔다"(5절)라는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열 명의 처녀가 결혼 잔치에 늦게 도착하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묘사가, 당시의 결혼 풍습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이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열 처녀는 교회이고, 신랑이 더디오는 것은 재림의 지연이며, 등과 기름은 사랑 또는 착한 행실이며, 미련한 다섯 처녀를 물리치는 것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둘째, 13절 결론 부분을 제외하고 비유 전체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앞선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비유에 묘사된 결혼 풍습은 예수님 당 시대의 것이라는 것이다. 신랑이 늦게 온 것은 결혼 지참금을 협상하느라고 늦은 것이고, 열 처녀는 들러리 역할을 하는 신부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면서, 청중들에게 종말의 때를 준비시키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자 초기 교회가 13절을 첨가하여 이 비유를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초기 교회도 '비유'로 받아들였기에,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한다. 말하자면 신랑은 신랑이지, 예수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알레고리적 의미를 갖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신랑의 도래가 천국의 도래이고, 슬기로운 처녀는 천국을 준비한 사람이며, 그 반면 미련한 처녀는 천국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셋째,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마태가 자신의 언어를 첨가하여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이 비유에 나타난 마태의 용어를 찾는다. 곧 "그 때에"(1절, 참고 마태에 90여 회 사용), "주여 주여"(11절, 참고 7:21~22) 그리고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13절, 참고 24:36, 42)라는 표현이 마태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마태의 용어를 삭제하고 축약된 형태로, 이 비유의 원형을 찾는다. 이들도 둘째 견해처럼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인 종말의 때를 준비시키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초기 교회는 재림이 지연되자 이 비유를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알레고리적으로 재해석하였고, 이것을 마태가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앞의 첫째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마태가 앞의 비유와 연관시키고자 사용한 "그때에"(토테)라는 접속 부사를 제외하고는, 이 비유 전체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13절은 마태가 이 비유의 결론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마태의 표현은, 마가의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막 13:33, 35)라는 표현을 마태 자신의 용어로 바꾼 것뿐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 '그레고레오'는 문자적으로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라"라는 뜻이지만, 이 단어에는 "조심하라, 주의하라, 정신차려라"라는 뜻도 있다(마 24:42; 26:38의 '깨어 있으라'라는 의미는 '주의하라, 정신차려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로 13절을 해석하면, 1~12절까지의 비유 전체 맥락과 일치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으나, 그들도 신랑이 언제 오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을 포함하여 비유를 듣는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기에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비유는 결혼 잔치에서 신랑이 더디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종말의 교훈을 주고자 말씀하신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읽는 마태 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에 나타난 '람파스'가 '등(불)'인지 아니면 '횃불'인지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다. 여기에 사용된 '람파스'는 등경 위에 놓는 '뤼크니아'(등불)는 아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3에서 '람파스'는 '횃불'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근거를 들어 '람파스'를 '횃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20:8의 방 안의 '람파스'를 '횃불'로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7절에 등을 "준비할새"에 해당하는 '코스메오'는 '손질하다'라는 의미로, 이것은 '심지를 잘라낸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 처녀라는 점을 고려해서 '횃불'보다는 '등불'이 더 적절하다.

결국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종말의 때를 늘 기억하고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말의 자리에는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준비하고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고,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대가로 신랑의 잔치에 참석하여 영원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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