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잔치의 비유(마 22:1-1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0년 08월 28일(금) 00:00 가+가-
7 인간은 마음이 부패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마태는 '혼인잔치(가모스) 비유'에서 그 잔치의 특성에 맞게 천국을 설명한다.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첫째, 혼인잔치는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최고의 잔치'이다. 유대 문화에선 그 잔치가 일주일 동안 지속된다(삿 14:17).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마태는 혼인잔치를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임금'이 그의 아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라고 말한다(2). 결국 천국은 우주만물의 통치자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둘째, 혼인잔치는 가장 좋은 음식으로 준비되며 또한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 풍성하다. 그래서 임금은 잔치를 위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4). 여기서 '소와 살찐 짐승'을 잡았다는 것은 최고의 고급 요리라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눅 15:27). 우리말 번역은 '소'와 '짐승'을 단수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본문은 복수인 '소들'(호이 타우로이)과 '짐승들'(타 시티스타)로 표현해서 그런 고급진 음식이 아주 풍성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임금은 "모든 것을 갖추어"(판타 헤토이마), 그야말로 산해진미로 가득한 아주 풍성한 잔치를 열었다. 이런 풍성함은 '오찬'(토 아리스톤)이란 단어를 통해 더욱 돋보인다. 이 단어는 '점심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눅 14:12), 그것은 잔치가 점심부터 저녁 늦게까지 지속되며 또한 잔치가 열리는 동안 계속해서 음식이 제공됨을 의미한다(요 2:3). 결국 이것은 우리가 천국을 마음 속에 간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풍족히 소유했음을 뜻한다.

셋째, 혼인잔치의 참석 여부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따른다. 비록 군주제 시대에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현실상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참석 여부는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문제가 이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은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초대를 거절한다(3). 그것은 그만큼 임금이 백성들에게 자유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은 종들을 다시 보내어 그들을 재차 잔치에 초대한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다시 한번 권하는 동양의 미덕이다. 임금의 두 번째 초대에도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자(5)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사실 무례해 보이지만, 참석 여부는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기에 임금도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임금이 분노한 것은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기"(6)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살인자들을 말함)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7, 새번역). 많은 이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임금이 초대에 거절한 모든 자들을 괘씸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죽인 살인자들만 죽였고,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만 불살랐다. 곧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판단의 자유를 허락하셨다(창 2:16~17). 그렇기 때문에 천국 문제도 각자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기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

넷째, 혼인잔치는 누구나 참여하는 축제이다. 임금은 처음부터 아들의 혼인잔치에 일부 사람만 초대하려고 계획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먼저 초대한 사람들은 그가 평소에 존귀하게 여긴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8b절)라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서 '합당하다'에 해당하는 형용사 '악시오스'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8b절은 '임금은 그들을 존경해서 먼저 초대했지만, 그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임금은 혼인잔치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잔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가급적이면 많은 자들이 잔치에 참석해서 아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길 바랬다. 그래서 그는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9)라고 명한다. 여기서 '네거리 길'(에피 타스 디엑소두스 톤 호돈)은 '교차로'가 아니라, '도시의 경계' 내지는 한 나라의 '국경지대'를 뜻한다. 종들은 아주 먼 곳까지 가서 나라 전체의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온다(10). 그래서 혼인잔치를 손님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은 천국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혼인잔치는 정결예식이다. 혼인잔치를 위해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마음 가짐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도록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정결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은 깔끔한 결혼 예복을 입는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도 신랑 신부에 대한 예우로 정결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다. 임금은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을 보고 거기서 "예복(엔뒤마 가무)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본다(11)". 그리고 그에게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12)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그는 전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자 왕은 예복 입지 않은 자를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13)라고 명령한다. 잔치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무례함에 따른 형벌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예복'은 '회개,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거룩한 행실'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째,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들은 소수이다. 잔치에 참석한 모든 자들 중에서, 자식을 혼인시켜 본 일부만 아버지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 마태는 아버지의 이러한 심정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라고 말하면서, 혼인잔치의 결론을 맺는다. 이런 마태의 결론을 우리는 두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결코 알지 못한다. 단지 회개의 자리에서 눈물 흘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둘째, 하늘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천국에 초대하지만, 믿음을 지키고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는 것이다(마 7:1~14).

결국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하늘 아버지가 우리 모두에게 천국이란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노심초사하시지만, 교만하고 정결치 못한 인간들은 그 선물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 선물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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