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한 극단주의 무슬림 소년의 믿음
[ 기독교영화보기 ]
작성 : 2020년 08월 26일(수) 10:00 가+가-
영화 '소년 아메드'를 보고
영화 '소년 아메드'는 한국에서 그리 익숙지 않은 무슬림을 다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황금종려상을 두고 경쟁했던 이 영화의 감독은, "칸이 사랑한 거장"이라 불리는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이다. 지금껏 벨기에의 실업, 불법이민, 빈민문제 등 사회적 문제들을 통해 윤리적 이슈를 다뤘는데 이번에는 최근 유럽의 심각한 사회문제인 이슬람 테러를 택했다.

영화는 이슬람 극우주의에 빠진 앳된 소년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를 따라간다. 급진적 이슬람 지도자 이맘(오스만 모먼)은 아메드에게 왜곡된 교리를 가르치고, 어린 시절부터 아메드를 가르친 이네스 선생님(미리암 아케듀)을 배교자로 몰면서 비난한다. 합리적 이성을 잃어버리자 싹튼 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목이다. 아메드는 이네스를 해치려다 소년원에 수감되지만, 배교자를 처단하려는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아메드는 종교적인 것 외에 큰 관심이 없다. 안경에 가려진 무표정한 얼굴이 달라질 때가 있다면 '반이슬람적 인물들'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알라를 대하듯 이맘을 대할 때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코란을 읽으며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피해 '종교적 정결함'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또래 루이즈(빅토리아 블록)와의 만남은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표정이 살아나는 듯하지만 이내 자신을 '오염'시킨 소녀를 밀쳐내고 만다. 그리고 '성전(聖戰)'만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는 듯, 자신의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혼란과 불안, 죄책으로부터 도망치듯 달려간다.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광기 어린 종교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종교는 왕왕 선과 악, 성과 속의 이분법 속에서 타자에게 혐오와 배제, 폭력을 자행하며 신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곤 한다.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고, 아메드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신앙이나 특정 신념에 매몰되어 자기만의 신을 쫓는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다. 때로 이익이나 탐욕, 권력과 세력 확장, 심지어 종교나 국가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웃 사랑, 고통 당하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연민, 책임의 공간은 없다.

영화에서 아메드가 맹목적 신앙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심판자의 자리에서 추락해 타자의 자리에 놓이는 순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마침내 그는 죽임이 아니라 생명을, 혐오했던 여성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잡기를 택한다. 안경이 벗겨진 채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며 흐느낀다. 역설적이게도 아메드가 가장 '종교적'일 때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일 때, '구원'이 찾아온다. 영생을 묻는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 "내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성찰의 차원으로 이끈다.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분의 피조물인 타자/세상에 대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음을 전제한 말이다.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세 속에서, 국민의 다수가 그 원인을 종교모임 및 활동이라고 인식한다는 통계가 있다.(경기연구원, 2020) 한국교회 전체가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고 예배를 비대면으로 전환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마주하는 가운데 교회는 거룩한 배타성을 세상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저마다 답변이 다를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지혜 목사/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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