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재중
[ 주간논단 ]
작성 : 2020년 07월 21일(화) 00:00 가+가-
어느 후배 영성신학자에게 "영성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금방 대답한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성신학자들이 책을 한 권씩 써서 표현하고자 했던 '영성'을 참 쉽게 말해주었다. 그 후 계속 곱씹으면서 목회하였고, 지금도 계속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부르는 그 한마디를 듣게 하기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으로 여기실 것이다.

바로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그 분의 자녀들이 사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8남매의 다섯째로 자라면서 형제간에 티격태격 다툼도 많이 있었지만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면 모든 것은 제 자리로, 조용히 돌아가고 해결되었다.

교단 총회가 열릴 때마다 가장 가슴 아파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송사가 노회를 거쳐 총회로 올라오고, 판결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세상법정으로 나가는 기독교 최고의 수치를 드러내는 경우다. 세상의 판사들이 무슨 말을 할까? "저 하나님 말도 안 듣는 사람들이!"라고 하진 않을까.

요즘 발터 니그가 쓴 '렘브란트'란 작은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또다시 뜨겁게 경험한다. 그의 작품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된 '잃었던 아들의 귀향'이 주제다. 물론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의 말씀을 영적인 감동을 통해 화폭에 담은 것이다. 아버지 집에는 많은 종들이 있고, 주변에는 그를 보는 눈도 많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 볼품없는 아들의 모습만을 본다. 그리고 끌어 안는다. 만일 이 그림에 다른 주제를 붙인다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아들아 나는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권위'다. 이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용서의 아버지'로 그 가슴에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 사랑의 용서와 그의 선포를 무시하는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는 편견, 편애의 못나고 옹색한 늙은이가 되고 만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며, 많은 행사를 줄이다 보니 그만큼 만남이 적어질 것이고 터무니 없는 다툼도 이제 그만 없어졌으면 좋겠다. 교회가 아버지 중심의 가정처럼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가정, 어떤 허물도 용서 되고 용납되는 그 가정!

그런데 큰 아들은 다르다. 어디서나 잘난 큰 아들은 아버지를 능가하고 형제를 무시하는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무시한다. 그렇다. 그는 세상 악한 사람보다 더 악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렘브란트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돌아온 탕자의 등 뒤에, 큰 아들도 같이 무릎을 꿇고 동생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그려넣고 싶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며 무엇이 무엇보다 옳은가?

우리의 가정사나 교회의 어려움은 아버지가 안계시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고쳐 말하면 영성은 없고 인성만 있는 것이다. 이번 총회에는 아버지 안계신 가정의 송사가 얼마나 올라올까? 모두의 변명은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 한다. 이것을 본 세상의 눈이 더 무섭고 두렵다. 그들의 입에서 우리를 향하여 도대체 "너의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 우리 아버지 부재중?

정삼수 목사/청주 상당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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