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소리, 판소리
작성 : 2020년 07월 15일(수) 10:00 가+가-
이신우교수의 음악이야기 (7) 해학 속 메시지 <적벽가赤壁歌>

박동진은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노래'가 아닌 '소리', 판소리. "절박할 때는 절박한 소리로, 급할 때는 급한 소리로, 원통할 때는 원통한 소리로, 한가한 때는 한가한 소리로" 외치는 판소리는 고운 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고운 소리보다 오히려 그늘이 있는 소리, 탁하고 곰삭은 소리"를 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자연에 가까운 소리이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자연의 환경과 사물, 인간의 원초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것이 판소리의 명창(名唱)이다.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잉태된 판소리는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반영한다. 19세기에 점차 조선의 양반계층으로 이동하면서 민중문화에서 양반계층의 취향과 문화가 일부 반영되었으나 판소리는 계급에 의해 지나치게 장식되지 않은, 여전히 솔직하고 정직한 인간 군상과 자연 그대로를 보여준다. "삶의 현실성과 음악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한국 고유의 문화유산이 갖는 철학이자 미학이다. 판소리의 명창이 내는 '소리'는 그 자체로 판소리가 갖는 정신을 보여준다. "성음(聲音)은 판소리의 예술적 표현의 핵심으로, 사람의 목소리로 자연의 모든 대상들의 현상과 본질을 표현해서 대상의 깊은 의미를 추구하고 이면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세계문화유산 판소리 제1부 성음의 비밀 중에서)

국악과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들, 즉 소리로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음악장르들은 음악가 자신의 철학과 미학, 정신을 투영할 수 있는 소리를 찾고자 평생을 수련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리는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만지는 어떤 힘이 있다. 러시아 작곡가 구바이둘리나(Sofia Gubaidulina)는 2014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악기의 소리에 내재된 영적(Spiritual)인 힘에 대해 깊은 관심과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다. 아마도 이는 인간 존재에 근원적으로 호소하는 어떤 깊은 파장과 울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만큼 국악이 갖는 소리는 클래식음악과는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인간 밑바닥 본성을 건드리는 어떠한 특별함이 있다.

한국의 작곡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필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아 주로 서양 클래식 악기를 위한 작품을 쓰면서도 동시에 국악기와 한국전통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판소리를 소재로 한 비올라 독주곡을 작곡하면서 판소리에 대해 조금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필자가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적벽가'는 조선시대의 판소리 열두마당 중의 하나로, 중국의 위, 한, 오 삼국 시대에 조조와 유비, 손권이 싸우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 중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적벽대전의 포화를 다루는 적벽가 중, 속사포와 같이 빠르게 읊어대는 명창의 아니리(창(唱)과 아니리로 구성되는 판소리에서 아니리는 주로 설명 또는 대화로 어떤 상황과 장면을 엮어나가는 것을 지칭함)의 사설(辭說)은 다음과 같다.

"…한 번에 불이 버썩, 하늘이 떠그르르르르, 강산이 무너지고 두 번에 불이 버썩, 우주가 바뀌난 듯 세 번을 불로 치니, 화염이 충천 풍성이 우르르…", "…오무락 꼼짝 달싹 못허고, 숨맥히고 기맥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어 죽고 서서 죽고, 웃다울다 죽고, 밟혀 죽고 맞어 죽고, 애타 죽고 성내 죽고, 덜렁거리다 죽고…바사져 죽고 찢어져 죽고, 흉하게 죽고 더럽게 죽고, 무섭게, 눈빠져, 서빠져, 등터져, 오사급사 악사 몰사하여 다리도 작신 부러져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고…"

사설은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적벽가' 속 명창은 존엄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이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듯 시큰둥하고 해학적으로 여러 병사들의 덧없고 하찮고 지저분한 죽음을 자세히 늘어놓은 후 곧 이어 이렇게 피 끓는 창을 한다. "즉사몰사 대해수중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국수 풀 듯 더럭 풀며 적극 조총 괴암통 남날개 도래송곳 독바늘 적벽 풍파에 떠나갈 적에 일등명장이 쓸디가 없고 날랜 장수가 무용이로구나"

'적벽가' 속 명창에 의해 창자에서부터 끓어 올려 토해지는 이 아니리와 창이, 코로나19로 속수무책 무수한 인명이 죽어나가는데도 이제는 더 이상 대수롭지 않은 듯 사망자 수만 나열하고 있는 전 세계 나라들의 지금 형국과 너무나 똑같지 아니한가!



이신우 교수/서울대 음대 작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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