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부활·영생
[ 4인4색 ]
작성 : 2020년 07월 01일(수) 10:00 가+가-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 에피그라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쿠메의 한 무녀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라고 묻자 '난 죽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쿠메의 무녀(巫女)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화와 전래동화는 인간의 삶을 요약하고 있는 고전이다. 아폴론을 섬겼던 무녀는 남다른 예언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가졌는데 아폴론이 그녀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하자 영원히 죽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늙지 않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결국 계속 늙어 몸이 오그라들면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살아 있는 것이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속성은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죽고 싶은데 죽을 수도 없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는 당시의 비극적 상태'를 은유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영원한 사라짐이 아니라 이 세상과의 이별일 뿐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이든 지옥이든 혹은 연옥이든 가게 된다. 살아서 천국에 든 에녹도 엘리야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 죽었다가 예수님의 명령으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결국은 '지금-여기 이 세상의 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고통도 질병도 없는 천국 백성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은 부활, 즉 새로운 탄생을 위한 축복인 셈이다. 그것을 확신하기에 숱한 순교자들이 있었지 않았을까.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하는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18)이 지상에서 열릴 수도 있겠지만 꼭 지구여야 할 것 같지는 않다.

안젤리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목판에 템페라, 38.5x37Cm, 1450, 산마르코 미술관, 피렌체)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은 마르다와 마리아다. 수의를 입은 나사로가 일어나 서 있는데 그의 뒤에 서있는 한 여인이 냄새가 지독하여 코를 손으로 막고 있다.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미루어보면 천국에 들 만한 믿음을 가졌다. 죽음으로 악취가 나는 옛 것을 버리고 천국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리라.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엘리엇 시의 쿠메 무녀가 의미하는 것과는 다른 영생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천국백성으로서의 영생을 의미하지만 쿠메 무녀는 세상 죄악의 DNA를 버리지 못해 죽지 못하고 있는 단지 이 세상에서의 오래 살고 있는 것을 뜻할 뿐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있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을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죽음 이후에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부활하여 영생하지만 원죄의 허물을 벗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철교 장로/영신교회 원로·배재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