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웃과 함께' 강찬성 장로의 삶과 신앙
[ 기획 ]
작성 : 2020년 06월 01일(월) 10:06 가+가-

신앙의 대를 이어가고 있는 강찬성 장로 가족. 강 장로는 낮아지고 배려하는 훈련을 통해 사회적 소외계층과 함께 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탄광의 작업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유독 그의 눈에 들어온건 시키먼 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광산노동자들이었다.

강원도 태백의 대한석탄공사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에게 광부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하나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물 섞인 절망을 치유해 주시옵소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영등포노회 부회계 강찬성 장로(목민교회)의 간증이다. 강 장로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석탄 가루와 사투를 벌이던 광부들의 모습을 보고 '섬김'을 다짐했다.

연민의 마음으로 시작한 섬김사역은 '자기 정화'로 이어졌다.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는 훈련이 됐다.

강 장로는 "광부들 대부분은 고된 노동과 어려운 가정형편을 술에 의지하며 발버둥쳤다. 일터는 물론 삶에서조차 흑암에 갇혀 지내는 그들에게 복음의 밝은 빛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춘천에서 진행된 남선교회의 저소득층 연탄 지원 사업에 참여해 연탄 배달을 하고 있는 강찬성 장로(사진 좌)와 남선교회 회원들.
강찬성 장로는 대구의 기독교가정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 장로가 3대째 신앙인이다.

"외할머니와 부모님께서 신앙이 돈독하셨습니다. 5살 무렵부터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집안 어르신들의 섬세한 신앙 보살핌이 제 인생의 건강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청소년기는 무탈하게 보냈다. 어려서부터 새벽제단을 쌓아오며 곁길로 새지 않았다. 미션스쿨인 계성중학교를 다니면서는 신앙이 두터워졌다.

졸업한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였다. 이 구절은 평생 신앙철칙으로, 그리고 자녀양육의 원리로 지켜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세가 갑자기 기울면서 장남의 책임감으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가족의 미래를 생각할만큼 철이 일찍 들었다.

강찬성 장로는 생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남선교회 맨'으로서 긍지를 갖고 평신도 선교 활성화에 기여해왔다. 논산 훈련병 진중세례식에서 세례 수종을 들고 있는 강찬성 장로.
졸업 후 태백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의 기능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약관의 나이에 타향에서 지내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찾아간 곳은 근처 장성중앙교회였다.

지역 청년회연합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회사 내 광부들을 전도하고, 청년들과 연합해 광부 진폐환자들을 치료하던 장성산재병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찬송을 불러주고 위로하는 사역을 했다.

당시 병원에서 원목으로 활동하던 남기탁 목사(복된교회 원로)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교분을 나누고 있다.

강 장로는 "남기탁 목사님에게 화려한 세상 뒤의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인자의 가르침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장성중앙교회에서 인생의 반려자인 홍순자 권사를 만났다. 당시 시청 공무원이던 홍 권사와 교회 청년부 활동과 성가대 봉사를 함께 했다.

그러던 1988년 어느날, 정금과 같이 단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녘 엄청난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급성맹장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종합병원을 찾아 정밀검사를 해보니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 흔한 감기조차 한번도 걸려본 적이 없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강 장로는 물론 온 가족이 절망감에 휩싸였다. 회사 내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별 수 없이 빨리 죽는구나'라는 악소문까지 돌았다.

강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부터 했다. 당시 강 장로는 회사생활을 핑계로 세속문화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도저히 떠날 수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구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였다. 병실에서 성경을 보고 기도로 마음을 달랬다. 그러자 염려는 평안으로 바뀌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기적적으로 수술실에서 암 종양이 염증으로 바뀌었고 일주일만에 퇴원했다. 집도의는 "이런 경우를 처음 봤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강 장로는 "투병 과정은 불순종을 철저히 깨뜨리는 시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느낌이었다"며 "이후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고, 작은 일에서부터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그 무렵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기술직 시험에 합격하고, 더욱 뜨거워진 신앙생활을 통해 33살에 교회 최연소 안수집사가 되기도 했다.

강찬성 장로는 목민교회 시무장로(사진 위, 당회원들과 함께)로 영등포노회 부회계를 맡고 있으며, 남선교회전국연합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30대 중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품은 그는 산업용배터리 제조를 하는 한국과 프랑스 합작 다국적기업에 공무과장으로 입사했다. 하나님 가라시면, 어디든 순종하고 가는 그였다.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새 직장에서도 그의 전도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일에는 안산제일교회를 출석하며 고등부 교사로 헌신했다.

조직 내에서 성실함으로 정평이 났던 강 장로는 대외적으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공기업이었던 서울의 대한송유관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현재 시무장로로 있는 목민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직장에서 간부로 한창 바쁘게 일했지만 교회 봉사에 소홀함이 없었고, 내 물질과 휴가를 써가며 남선교회 연합회 활동에도 매진했다.

현재 남선교회전국연합회 부회장인 강 장로는 최근 10년 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중앙실행위원으로 남선교회를 섬겼다. 이게 얼마나 성실함을 요구하는지는 남선교회 연합회 활동을 해본 이들은 안다.

전국연합회에서는 서기, 회계, 감사 등을 두루 거치고 규칙부, 재정부, 국내선교부, 러시아선교위원회, LJP위원회 등에서도 봉사하며 '남선교회 맨'으로서 긍지를 갖고 실무에 임했다. 뚝심있는 신앙심과 공기업에서 닦은 행정업무 능력이 알려지며 전국연합회 임원으로 4년 연속 등용됐다.

강 장로는 "남선교회가 4년 후면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총회 산하 자치단체로서 연합과 협력을 통해 선교, 교육, 봉사에 더욱 매진함으로 100년 위상에 맞는 복음의 파수꾼이 되기를 기도한다"며 "미력하나마 남선교회의 새로운 도약에 쓰임받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강찬성 장로는 홍순자 권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모두 목민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의 대를 잘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 먼저,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강 장로 집안의 신앙가훈이다.

신동하 기자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