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서 성경공부, 단체 세례 받기도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5월 29일(금) 15:49 가+가-
⑤-1. 본보에 남아 있는 전쟁포로 관련 기록들

거제도 포로수용소.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자료

포로수용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보에는 '1952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미국인 옥호열 선교사(Harold Voelkel)가 '만일 석방되면 은혜와 소명감에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라고 하니 641명이 거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240명, 졸업 후 목사가 된 사람은 150명으로 전해진다.

6.25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한 옥호열 목사는 유엔군이 북진함에 따라 평양, 재령, 함흥, 원산, 흥남 등에서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동시에 배와 열차를 동원해 많은 북한 기독교인들에게 월남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한 옥 목사는 600여 명의 수용소 단체세례로도 유명하다.

1972년 본보가 마련한 반공포로 출신 목회자 좌담에선 '공산당이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1950년 6월 24일 평안북도 도청으로 모일 것을 명령했지만 다음날이 주일이어서 목회자들이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목회자들은 다음날 전쟁 발발 후에야 공산당이 먼저 교회 지도자들을 살해하려 했음을 깨달았다.

당시 1개 포로수용소엔 1만 명 이하의 인원이 수감돼 있었다. 수용소는 하나의 작은 국가였다. 수시로 폭동이 일어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우익이 세력을 잡으면 태극기를 달고, 좌익이 세력을 잡으면 인공기를 걸고 국가 행세를 했다. 당시 군목의 중요한 역할은 폭동을 막는 것이었다. 포로들의 성향을 구별해 좌익과 우익을 격리해 충돌을 막았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군에게 잡힌 남한 포로도 있었다. 9만 명에 달하는 포로 중 석방된 자들은 1만 명 미만이고, 대부분 인민군에 재배치됐다. 군대에 배치되는 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일이었다. 사상범은 보통 탄광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죽음을 맞았다.

반공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 마다 교회와 교인소대가 있었고, 성경통신과 과정이 진행됐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처음 맛본 신앙의 자유가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최초의 탈북자인 반공포로들. 당시의 탈북은 공산주의에 항거하며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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