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과 성(聖)이 함께 하는 윤리를 위하여
[ 4월특집 ]
작성 : 2020년 04월 10일(금) 00:00 가+가-
여전히 왜곡된 한국사회의 성윤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매체 환경이 달라지면서 전달 방식이 새로워졌을 뿐. 아, 물론 '늘 그래왔다'는 것이 'n번방 사건'과 같은 방식의 삶을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성(性)은 권력 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성경을 봐도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생계 노동을 위해 주변 도시국가에 들어갔다가 그곳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다. 다윗이 자기 충복의 아내를 마음대로 불러 간음한 것은 그가 왕이 된 직후의 일이었다. 옥상까지 있는 견고한 왕궁을 세우고 높은 곳에 올라 어슬렁거리던 어느 나른한 오후에 발동했던 권력자의 욕망이었으리라.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항간에 떠도는 '흥청망청'의 유래를 봐도 매한가지다. 왕(연산군)의 노리개를 차출하는 것을 직업으로 한 '채홍사'까지 있었다니, 동서 할 것 없이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허용한 '강자의 약자에 대한 유린'이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 않다고 한 것이다.

물론 신분제는 무너졌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도적 권력, 즉 가부장제의 습속은 아직도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 존재한다. 한 가지 소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런 행태가 가부장제의 '문화적 관성'이라는 점이다. 물건에만 관성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적 동력은 그쳤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며 독립된 주체라는 선언은 민주 사회에서의 제도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n번방'이나 '박사방' 사건이 커다랗게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자체가 어찌 보면 약화된 가부장제를 시사한다. 가부장제가 견고하던 시절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살기 좋아졌으니, 적어도 좋아지고 있으니, 조금 더 참으라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또 다른 '문화'가 새로운 동력을 가지고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n번방' 사건에서 보듯이 '노예'라는 말이 버젓이 사용되고 수직적 권력 관계에 입각한 성 착취가 재현되고 있다. 이번엔 매체의 문제로 인해 그 심각성이 더하다.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실시간 파급력이 무궁한 인터넷 세상이다 보니, 약자의 성을 착취하고 유린하는 사람은 실제 권력을 가진 소수에 제한되지 않는다. n번방 회원이 26만명을 육박한다고 하고, 수위가 더 '높은' 영상물에 대한 접근 권한을 갖기 위해 돈을 낸 유료 회원들도 1만 명이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오프라인 범죄라면 범인을 잡으면서 사건이 종료될텐데 온라인은 그렇지 않다. '박사'를 잡으니 그 방의 유료 회원이었던 '태평양'이 독립해 또 다른 유해사이트를 운영했다 한다.

'태평양'의 나이는 고작 16세. "갈수록 말세다"라며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차지만 청(소)년들이 이런 성 문화에 일찍 노출되게 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뭐든 검색하는 디지털 세대인 아이들이다. 그런데 네이버든 다음이든 들어가 보면 메인 화면 테두리 광고물이나 문화 콘텐츠의 선정성과 비정상성이 기가 막힌다. 물론 이윤 창출을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래놓고서 청(소)년들의 성적 타락 운운하는 것은 어른들의 직무유기란 생각이 든다. 뭐든 돈으로 사고파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성(性)도 판매와 구매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한 인간을 물리적 노동력으로 축소하여 이를 항구적으로 노예화하거나 사고파는 존재로 응시했던 야만적 시절에, 노예 제도가 분류한 성(性)의 범주는 두 종류였다. 자유민의 성과 노예의 성! 게다가 노예제는 가부장제와 중첩되어 있었기에 '노예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중의 종속성을 의미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성향(이것이 성이다)'이 어떠하든지 그녀는 물리적 노동력에 더하여 성적 노리개로만 응시되었다. 낭만적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근·현대 결혼제도는 남·녀 간의 주종 관계를 넘어선 듯 보였으나, 결혼 내 강간을 범법 행위로 인정한 것은 최근이었다. 그런데 이제 소비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의 문화적 관성과 연합하여 돈으로 약자의 '성'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새로운 동력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노예제와 가부장제의 응시를 뛰어넘어 말씀하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 27~28)." 회원가입을 한 것도 아니고, 음란물을 시청한 것도 아니다. '그냥' 마음을 품은 것, 그러니까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응시하는 것 자체를 '간음'이라 하셨다. 어디 그뿐이랴.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지옥에 던져지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음란하게 쳐다보는 눈을 뽑아버리고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손을 찍어버리라고, 살벌하게 경고하셨다.(마 5: 29~30).

이걸 도대체 어찌 지키나? 하여 이 본문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지킬 수 없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하나의 '몽학선생'으로 삼고 사후 회개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 본문은 징벌과 은혜의 이항 대립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여자가 어찌 성 노리개인가? 여자도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거룩한(聖)' 존재이다. 자유의지를 가지며 창조성이 있고 자기만의 '성(性)'으로 세상에 새로움을 가져올 귀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몸'으로 보느냐? '노리개'로 보느냐" '종'으로 보느냐? 본문을 이렇게 읽어낸다면, 의외로 우리가 견고히 해야 하는 성 윤리의 원칙은 간단하다. 사람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함하여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성(性)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성(聖)스런 소명이다. 그러니 제발, 여자를 사람으로 대하라. 그것이 '창조 질서'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의 도리이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기독교사회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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