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처럼
[ 논설위원칼럼 ]
작성 : 2020년 03월 23일(월) 00:00 가+가-
어느 날 요한의 제자 안드레는 스승 요한의 권유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는 예수님께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질문으로 대답했다.

사실 안드레의 질문은 약간 이상하다. 스승 요한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은 '당신의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의 주거환경을 묻는 듯하여 어색하다.

이런 안드레에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다. 요즘 "와서 보라"는 말이 귀해졌다. 자신의 환경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심방을 꺼리는 교인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멋진 집이 있기에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일까? 안드레가 본 예수님의 환경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작은 월세방, 이부자리 한 채, 손때 묻은 책 두어 권, 뒤축이 내려앉은 구두, 무릎이 나온 바지 … 이렇게 초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드레가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만드시는 삶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골방에는 생명과 평안이 흐르고 있었다. 그 미소와 두런두런 건네시는 진리에 매료되었다. 그 외모가 아니라 삶을 보는 순간 "기다리던 바로 그분!"이라고 금방 깨닫게 되었고, 형님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게 되었다.

얼마 후 안드레와 시몬처럼 벳새다가 고향인 빌립도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또 얼마 후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했더니 나다나엘의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면서 시큰둥했다. 이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와서 보라"고 했다. 빌립은 자신이 반한 예수님의 삶을 보면 나다나엘도 반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나다나엘도 결국은 예수님을 본 순간, 그분의 사람이 되었다. 그 역시 예수님의 삶에 취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람의 환경을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삶을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예수님과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참 아름답다. 예수님께서는 보여 줄 삶이 없어 환경을 과시하거나, 선물로 상대방을 유혹하는 이들과 다르다. 또 그런 예수님을 따른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도 사랑보다 상대의 조건에 매혹되어 결혼하거나 따르는 이들과는 달랐다.

목회자를 청빙하는 광고를 볼 때가 있다. 교회들이 원하는 청빙 조건은 대개 비슷하다. 그리고 그 조건들의 대부분은 '어떤 집에 사느냐?'는 식이다. 청빙에 지원하는 이들은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억지로 집이라도 한칸 장만하느라 애를 먹는다. 좋은 조건을 물려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무능을 탓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렵게 성사된 후에는 얼마 되지 않아서 삶에 실망했다는 말들이 피차 간에 나오곤 한다. 그래서 씁쓸할 때가 많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무섭지만, 우리 안에 침투하는 왜곡된 가치관은 더 무섭다. 우리도 "와서 보라"고 당당히 초대할 수 있으셨던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반했던 요한복음 1장의 사람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김운성 목사/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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