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적거리는 제도교회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0년 01월 24일(금) 00:00 가+가-
도마복음을 대중에게 소개하면서 도마복음이야말로 예수의 정신을 간직한 문서이며, 정경의 복음서들은 제도교회의 신학에 오염된 문서라고 한 이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솔깃했지만, 그들 중에 도마복음서를 제대로 읽어 본 이들은 많지 않다. 특별한 사전지식이 없는 이라도 도마복음을 직접 읽어 보면 정경복음서와 다른 분위기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도마라는 개인을 영웅화하는 것이다. 이 문서에서는 도마는 특별한 이해력을 가진 제자이며, 그에 비하면 다른 제자들은 바보 같아 보인다. 누가 이 문서를 만들었을까? 신학교 교실에서 이 문서를 찬찬히 읽히고 물어 보면, '도사모'라고 대답한다. 도마의 팬클럽이 산출한 문서임에 틀림없다.

정경의 복음서들은 확연히 다르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고 전해지는데, 마가가 전하는 베드로는 예수를 오해하고, 배신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까지 듣는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안에 사도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모든 초점이 예수께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인간이 실패한 지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다. 어떤 인간을 높이지 않고 예수를 높이는 것이 정경복음의 특징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기준에 미달하는 복음서가 생각난다.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로 묘사된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누군가 나를 팔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직접 예수님께 물어 보지 못하고 이 제자에게 물어 보라고 머릿짓을 한다(13:23).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갈 때 먼저 도착한 이는 이 제자이다. 그러나 그는 무덤 앞에 서서 들어가지는 않는다. 베드로는 허겁지겁 달려 들어가 세마포를 확인한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에 대한 존중을 볼 수도 있고, 직접 헤집지 않아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헤아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해내는 혜안, 혹은 그 제자의 차분함을 읽어낼 수도 있다.

이런 차이는 21장에 분명히 나타난다. 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명을 따라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을 때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말해 준다. 그 때까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린다(21:7)." 매사에 깨달음이 늦고, 행동은 앞서는 베드로라는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샛별같이 빛나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 가까운 면이 있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이 익명의 문서라는 점이 중요해진다. '요한복음'이라는 표제는 후대의 것이다. 본문은 이 제자가 누구인지 철저히 숨긴다. 만약에 요한복음이 한 인물의 실명을 거명하며 이 정도로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했다면, 정경으로서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저자에 대해서 사도요한, 장로요한, 나사로 등 갖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우리는 저자를 익명으로 남겨 놓은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요한복음의 의도는 단지 한 인물을 높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 사이의 우열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하려 한 것도 아니다. 베드로와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저자가 제시하는 방식에는 어떤 의도가 있을까?

요한복음은 그 제자의 탁월성을 주의 깊게 제시하고 마지막에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1:24)"고 함으로써 그의 탁월성을 텍스트의 신뢰성과 연결시킨다. 베드로는 제도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제도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위에 놓으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신약학자 타이센은 이런 해석을 제시하면서, 오늘의 현실에서 성경의 권위를 계승하는 이들은 신학자들이라고 말한다. 진리를 현실에 적용하고 수호하는 신학자들의 통찰을 존중할 때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로 설 수 있다. 신학자들이 이론을 말하면 '현장성'의 결여를 개탄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 목회자들은 변화무쌍한 요구와 복잡다단한 도전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현장의 요구가 제도교회를 허둥대게 하고, 때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티브이나 영화에 나오는 교황의 화려한 의상을 보면서, 나는 '제 1대 교황'이라는 베드로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연상되어 혼자 실소를 하기도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 제도교회의 수장들은 자주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개신교 교단이라는 제도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일선에서 현실의 다양한 요구에 반응해야 하는 베드로의 후예인 제도교회의 대표들이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교회가 균형을 유지하고 살아남는 길,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맡은 신학자들의 영역을 보호하고 지도를 받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고 시류에 따라 이러 저리 치우칠 수밖에 없는 현장의 목소리들이 교회의 큰 방향을 결정한다면,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

반면에 베드로의 온갖 한계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이 베드로에게 교회를 이끌어갈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현실목회자들이 지식과 통찰력에 있어서 자신들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회자들과 제도교회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교회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중심에 제도교회의 대표가 자리할 수 있도록 양보하고, 도와줘야 한다. 빈 무덤 앞에 먼저 도착한 그 제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그에게 양보했던 것처럼!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전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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