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0년 01월 17일(금) 00:00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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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떤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런데,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오스뢰네 지역의 왕 압가르 5세와 예수님 사이에 오간 편지를 소개한다. 이 왕은 문둥병에 걸렸는데, 예수의 치유이적을 듣고 자신의 왕국에 와 달라고 편지한다. 박해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까지 덧붙인다. 예수는 방문을 거절하면서, 후에 자신의 제자들이 그 왕국을 방문하여 치유를 베풀 것이라는 답장을 보낸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 나에 대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나를 보는 자가 믿지 않고, 나를 보지 못하였으나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이 분명하다. 3세기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 이 말씀이 있는 것은 당시 교회 고민의 일단을 보여 준다.

복음서들은 70~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 재림에 대한 기대는 퇴조하고, 1세대 주요 증인들과 사도들은 세상을 떠나는 시기, 밖으로부터의 핍박과 압력은 거세지는 때에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는 절실했을 것이다. 이 때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에는 은사나 체험, 기적의 추구, 신성한 장소의 강조, 예전의 확립 등이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기적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명확히 한다. '떡을 먹고 배불렀던 까닭'에 예수를 찾던 이들은 예수가 '말씀'을 이어가자 떠나 버린다. 예수 곁에 남은 이들은 '영생의 말씀(6:68)'을 중심에 둔 자들이다.

니고데모는 표적(3:2)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믿음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어지는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표적도 보지 않았으나,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 믿음은 단박에 증거로 이어진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4:39)." 그리고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41)"졌다. 기적이 반드시 믿음을 결과하지는 않는다. 살리는 힘은 말씀에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2)."

가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 역사적 예수의 맥락에서 이 말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시오" 정도의 평범한 말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거듭 전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문자로 기록했을 때, 그 무게는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4장에서 몇몇 기적을 보도하지만 마가의 것을 옮긴 것이다. 누가가 단독으로 보도하고 있고, 또 세심하게 기록하는 첫 기적은 5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만선 기적이다. 요한의 가나혼인잔치 기적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적의 보도에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는 말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가나에서의 마리아의 말과 비슷한 강조점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란 '듣고 믿는 자'이다. 도마에게 주어진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요한은 복음서 기록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의 말씀을 통해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20:30~31). 요한의 부활현현 기사에서 도마가 하고 있는 신학적 역할을 누가에서는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한다. 갈릴리에서 온 원제자그룹이 아닌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를 따라나선 주변부제자들의 부활경험을 소상히 기록된 것은 역사적 예수의 기억과는 먼 지점에서 살아갈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배려이다. 이들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부활한 예수의 신비한 현존이 아니라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던' 일이다. 부활한 예수는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만,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그 부활한 예수의 현존이 하지 못한 일까지 하고 있다.

누가와 요한의 공통적인 강조점은 80~90년대의 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는 길을 말씀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 역시 산상수훈을 비롯한 다섯 개의 말씀모음으로 복음서 틀을 잡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말씀 중심의 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마가는 70년 경에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제시했고, 마태, 누가, 요한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를 계승하면서 말씀중심 신앙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70~100년의 시기는 바울서신이 하나의 묶음으로 회람되어 읽혀지기 시작하고, 복음서들과 신약의 대부분이 기록된 '위대한 책의 시대'였다. 1세대 사도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볼 수 없었으나 책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된 자들이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큰 방향이 정해진 시기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바울은 이사야 53장 1절을 인용하여 이 말을 하는데, 요한도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표적이 아닌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요 12:37~3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의 첫 마디는 복음서 전체의 방향을 부여할 뿐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명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전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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