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지만- 요한복음의 이원론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19년 12월 27일(금) 00:00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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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가 있다. 이 가사는 요한복음에서 나왔다. 1장 15절을 개역개정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니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 '깨닫다'로 번역된 단어는 카타람바노로, '이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이다. KJV는 comprehend로 옮겼지만, NRSV, NIV, ESV 등 주요 현대번역들은 죄다 overcome이라고 하여 '이긴다'는 번역을 택하고 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대조되며 이원론적 경향이 강조되는 번역이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에서 한 설교자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63)"라는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복음을 열심히 인용한 그 설교자는 세상에서의 노력은 무의미하며 오로지 신앙생활만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지나치게 현세의 가치에 압도되는 문화에서 필요한 면도 있으나, 현실에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험이 느껴졌다. 요한복음에는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위와 아래, 영과 육, 생명과 죽음, 사랑과 미움 등이 명백하게 대조되고 있어, 이원론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사상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전형적인 이원론들과는 구별된다.

우리가 '이원론(dualism)'이라고 하는 사상에는 많은 갈래가 있다.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며 따라서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은 열등한 신이라는 식의 영지주의와 그 배경을 이루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사상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태초에'라는 말로 창세기의 첫구절을 상기시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4)"라는 말로 육체와 물질의 세계를 적극 인정한다. 선과 악의 투쟁과 그 향배가 주요 플롯을 구성하는 것이 우주적 이원론의 드라마라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승리가 분명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긴장으로 점철되는 이원론적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다.

이원론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권하기도 한다. 사해 지역의 쿰란이라는 동굴 근처에서 집단생활을 한 유대종파가 이런 유에 해당한다. 그들이 남긴 문서에 니오는 빛과 어두움 등의 표현이 요한복음과 많이 겹치기 때문에, 이 두 집단의 사상적 유사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말한다(3:16).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이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6:51)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7:18, 참조 20:21)"라는 말에서처럼 세상 속에서의 실존, 세상을 향한 선교가 강조된다. 요한복음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13:34)"는 계명의 빛이 워낙 강력하여 폐쇄적인 종파(sect)로 오해 받지만 요한복음은 외부를 향해 열린 태도를 가진 공동체이다(10:16, 17:20).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를 자주 부를 때 우리는 빛과 어두움이 깔끔하게 분리된 세계를 상정한다. 저들은 어둠이고, 우리는 빛이다. 저들은 불의이고 우리는 정의이다. 역사 속에서 이런 선명한 전선을 그어 놓고 싸움을 해야 할 시대가 자주 있었다. 본회퍼 목사가 나치 정권과 싸울 때가, 한국교회가 삼일운동에 앞장 설 때가 그랬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어둠과 빛을 깔끔히 나눌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도 비진리가 있고,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모든 면에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지금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포기하고 눌러 버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깊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셨다. 설령 지금 '어둠'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 '개인'이 얼마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빛으로 나아 올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어떤 영역도 그 통치권에서 양보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통속적 이원론과 요한복음의 세계이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둠에 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빛으로 나아 오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이원론의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빛과 어두움의 중간 어디쯤에 속한다.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지성인도, 도마로 대표되는 의심많은 제자도 그렇다. 요한복음이 이원론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이원론, 초청하기 위한 이원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개역개정의 해석도 틀린 해석이 아니라, 여전히 강력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정복의 대상이기 이전에 빛으로 초청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 된다.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전 한일장신대 신약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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