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달론
[ 논설위원칼럼 ]
작성 : 2019년 12월 16일(월) 00:00 가+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라는 저서에서 문자의 기원과 특성을 설명하면서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파르마콘'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 단어인데 '약'이라는 뜻과 '독'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문자'가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벗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독'이 되기도 하지만,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파르마콘'이라고 했다. 이처럼 상황과 쓰임새에 따라 이중적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그리스어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칸달론'이다.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혹은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스칸달론'이 되었던 대표적인 예로 두 인물을 들 수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님의 '스칸달론'이 되었다. 그는 예수께로부터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았다(마 16:23).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대립시킴으로써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스칸달론'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스칸달론'이 될 수 있다.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칸달론'에 의해 넘어지지 않도록,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의 '스칸달론'이 되지 않도록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벧전 5:8-9a)에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베드로와 다른 모습으로 스칸달론이 되었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살아있는 돌' 그리스도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커다란 '스칸달론'이 되었다(고전 1:23). 그들이 걸려 넘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들의 신념과 판단에 의존하여 예수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와 교계에는 온갖 거짓되고 추한 '스칸달론'이 판을 친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와 가짜 뉴스들, 고상하게 포장된 탐욕과 방탕함 등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의 '스칸달론'이 되었듯이, 교회가 '스칸달론'이 되고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의 '스칸달론'이 되고 있다. 명분과 말은 화려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본질이 흐려진 교회와 신학, 도덕성을 겸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행보를 바라보며 과연 참종교와 사이비 단체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짓과 부패와 불의가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스칸달론'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정의가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스칸달론'의 자리에 서 있는가? 1세기 헤롯 왕국에 '스칸달론'으로 오셨던 아기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묵상하는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냉철하게 헤아려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윤효심 목사/여전도회전국연합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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