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
[ 흔적을찾아서 ]
작성 : 2019년 12월 12일(목) 18:01 가+가-
12.'탈북자의 어머니' 주선애 권사의 사모곡

주선애 권사와 어머니 변정숙 권사.

-"춥고도 바쁜 시기에 이처럼 먼 길을 여기까지, 이처럼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도록 이끌어 주신 크고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이 땅은 고(故) 황덕주 목사님께서 한 세기 전에 하나님께 헌납해 교회 터전으로 쓰시기로 했던 소중한 땅입니다."

2019년이 저물고 있는 지난 11월 29일 오전 11시,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황효자길 58-1. 독신 여선교사 은퇴관 부지 헌납감사예배가 사단법인 '세빛자매회' 주최로 열렸다. 차가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리라. 건축위원장 주선애 권사의 환영인사는 차일(遮日)을 쳐놓은 널찍한 마당을 한가득 메운 100여 명 참석자들의 가슴에 'G선상의 아리아'처럼 고즈넉한 감동으로 울려 퍼졌다.

-"세계만방에 흩어져 평생을 바쳐 복음을 전하며 헌신했던 선교사님들이 이제는 돌아와 안식을 누려야 마땅한 때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아직 그분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 있질 않습니다. 특별히 독신(獨身) 여선교사님들이야말로 맞아주는 가족들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형편입니다. 연약한 여성들이 기도하며 세빛자매회를 설립, 첫 삽을 들었사오니 한국교회가 기도와 힘을 보태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주선애 권사의 낮고도 부드러운 환영사가 죽비처럼 가슴을 때림은 필자만이 느끼게 되는 아픔일까? 며칠 전, 주 권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고 목사님, 아직 시차적응도 덜 됐을 터인데, 어쩌면 내가 마지막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볼리비아 다녀온 얘기도 듣고 싶고 보고도 싶으니까, 오셔서 살피시고 가이드를 좀 주시면 좋겠어요.

필자는 '한국기독공보'에 연재중인 '흔적을 찾아서' 취재차 지난 10월 14일부터 31일까지 18일 동안 임화식 목사(순천드림교회 시무)와 동행, 남아메리카 볼리비아를 다녀온 길이었다. 장거리 여정 속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칠레 리마, 쿠스코 그리고 볼리비아라 파스, 산타 크루스 등지를 경유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 선교사들을 만났고, 세계 구석구석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경유지 미국 LA에서, 오랜 친구와 동역자를 만나기 위해 하루를 머물렀다. 동역자 장인관 목사는 필자가 영국 유학시절 '런던한인교회'를 섬길 때 부목사로 모시고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다. 그는 '나성영락교회' 선교담당 사역을 마치고 선교단체 '선교사의 친구(FOM; Friends of Missionaries)'를 창립,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는 바, 그의 코멘트는 차라리 한국교회를 향한 질책이라 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비난합니다. "LA는 한국 선교사들의 무덤이다!" 맞습니다. 이곳엔 은퇴 선교사들이 모여듭니다.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은퇴 선교사님들을 맞아주려 하지 않는, 아예 준비조차 하고 있지 않는 한국교회의 책임 아니겠습니까?

#독신여선교사은퇴관 부지 헌납 감사예배

이성희 목사(세빛자매회 대표이사) 사회로 진행된 감사예배는 김일례 권사(영락교회)의 기도와 영락교회 제1여전도회 임원단의 찬양, 서기 임규일 목사의 경과보고, 오세철 목사(개봉교회 원로)의 축사 그리고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의 '집짓기'(마 7:24~27) 제하의 설교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집짓는 분으로서 '우주(宇宙)'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짓는 목수(tevktwn)로서 죄로 무너진 '인생(人生)'이라는 집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는 목수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목수 리더십'으로 '인생 집짓기'를 착수합니다. 독신 여선교사 은퇴관 건립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거룩한 사역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장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원로)는 이 감사예배의 교회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선교 130년의 역사 속에 4만여 명에 이르는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했습니다. 그 중 독신 여선교사들은 거의가 열악한 빈곤지역이나 오지에 나가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이 들고 건강 잃어 고향에 돌아오려고 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조국 땅을 밟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형편입니다. 세빛자매회의 작은 발걸음이 한국교회 역사에 초석(礎石)과 시금석(試金石) 되기를 소원합니다.

상임이사 김화자 목사는 세빛자매회의 탄생과 오늘의 행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세상에 빛을 발하자'는 의미를 담고있는 세빛자매회는 평소 주선애 교수님과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지인들이 모여 탄생시켰으며, 그 첫번째 사역으로 주 교수님의 헌금과 황영일 장로님의 부지 헌납으로 이 아름다운 땅에 독신 여선교사 은퇴관을 건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입니다만, 거기 하나 더 곁들이자면 나의 나 된 것은 오마니 때문입네다!" 나의 어머니 변정숙 권사님은 스물 한 살에 남편을 사별하고 18개월 된 딸 저 하나를 기르시며 한평생 청상과부로 사시다가 96세로 생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전부이며, 나 또한 어머니가 전부입니다.

주선애 권사의 어머니 회상은 끝이 없다. 이 대목에서는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향인 평양 사투리와 억양이 자연스레 피어 오른다. "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 자서전 '주님과 한평생'(2011년 초판본/두란노서원)에서도 맨 먼저 어머니에 대한 추억에 목이 메어 지면의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음을 본다.

-어머니는 집에서 십리 넘게 떨어진 건산(乾山)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간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됐다.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에게 교회에서의 모든 경험은 놀라운 일이었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김기복 목사님이 추모사를 하시며 "우리 변정숙 권사님이 해주시는 만두 냉면 안 잡숴보신 이가 있습니까?"라고 하셨다.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하셔서 누구든 방문하면 빼놓지 않고 일일이 대접해서 보내곤 하셨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6년 여름, 마포구 망원동에 사셨던 주 권사님의 어머니가 영국 유학 떠나는 우리 다섯 식구를 초청, 냉면에 만두국 끓여주시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1996년 10년만에 귀국했을 때엔 강동구 길동으로 이사, 지금 이 아파트에 거주하셨는데, 이미 치매가 찾아온 형편. 그러나 우리 내외가 방문할 적이면 영락없이 거행되는 '거룩한 의식' 같은 것이 있었으니, 자서전 가운데 '지성보다 강한 영성' 대목에서 주 권사는 이렇게 묘사해 놓고 있음을 보게된다.

-어머니는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셔도 제가 "고 목사님 내외분 오셨는데 기도 좀 해주시지요"라고 부탁하면 사양하지 않고 젊을 때와 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하셨다.

불가사의(不可思議)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것이었다. '지성(知性)보다 강한 영성(靈性)'은 주 권사의 그 모든 것,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선물 아니겠는가. 23살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미망인에게 당부했던 유언- "우리 딸 선애는 기독교 선생으로 키워달라!" 남편의 그 유언을 받들어 한 평생 딸자식 하나 붙들고 희생 봉사의 삶을 사셨던 "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 애모(哀慕)를 넘어선 애모(愛母)의 정은 끝이 없어라! 주 권사는 고백한다. "지금도 한 없이 어머니가 보고 싶지만 슬프지는 않다"(주선애, 주님과한평생, 두란노서원, 2011, 서울, pp9-35). 그리운 "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 때문 아니리오.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2019년 12월 7일 토요일. 필자는 어머니 변정숙 권사님 사진 몇 장을 구하고자 강동구 길동 소재 주선애 권사 자택을 방문했다. 대설(大雪)이라는데, 큰 눈은 오지 않고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평소 사람들로 넘쳐나던 널따란 아파트가 적적하다. 요양보호사 홀로 주권사를 모시고 있잖은가.

-글쎄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났어요. 내가 죽으면 이 집이 장로회신학대학으로 넘어간다고 그랬더니, 저마다 거처할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뿔뿔이 흩어졌어요.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들 지낼꼬?

무슨 얘긴가? 현재 기거하고 있는 그 아파트를 오래전 평생 교수로 사역했던 장로회신학대학에 헌납했던 것. 그리고 현재 장신대가 영성훈련장으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은성수도원'도 주 권사의 헌납예물이다. 어디 그뿐이랴. 어머니로부터 '베푸는 은사'(행 20:35)를 물려받은 주 권사의 무소유(無所有) 선행(善行)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 지금 그 아파트엔 평소 오갈데 없는 북에서 온 사람들로 득시글거렸다. 신학생, 택시운전사, 여공, 가정부, 환자도우미, 심지어 윤락여성 출신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요, 평안도 함경도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북선(北鮮)말이 표준어처럼 쓰여졌다. 사실 주 권사에겐 여러 가지 호칭이 붙어 다닌다. '눈물의 선지자' '기독교 교육의 선구자' '기도의 어머니' '한국교회 대모' '다리를 놓는 사람' '한국교회 마담뚜' 등등. 주 권사가 아끼는 별칭은 '탈북자의 어머니'. 필자는 '피아니시시모(pianississimo)'처럼 흘러나오는 주선애 권사의 낮은 목소리를 새새틈틈 듣곤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음(呻吟)같은 독백(獨白)이어서, 나의 아린 가슴으로 새겨야만 했다.

-나는 탈북자입니다. 순교가 무서워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나에겐 북한 사람들을 섬겨야할 '거룩한 책무(holy duty)'가 있습니다. 두고 온 나의 고향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 거룩한 성(Holy City), 하나님의 도성(都城)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한사(限死)코 회복해야 합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마지막엔 고향쪽을 향해 머리를 둔다 했던가. 1924년 평양 출생이니 주선애 권사 연치(年齒) 95세. '탈북자의 어머니' 고향찬가(故鄕讚歌)는 젊디젊고 싱싱하기만 하다.

-평양은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동편에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 그 북쪽으로 능라도가 보이고요,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굽이굽이 흘러내립니다. 아아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2001년, 남북적십자사 주관 이산가족상봉 때, 주선애 권사 내외분이 극적으로 남녘 100명의 고향 방문단에 뽑혀 평양을 다녀왔다. 그 이후 주권사의 꿈은 더욱 더 싱그럽고 아름답다.

-나는 하늘나라 영원한 소망과 함께 이 땅의 탈북민들이 북한의 기둥들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낙락장송(落落長松) 넉넉한 품에 남(南)과 북(北)을 얼싸안고 오늘도 짙고도 푸르른 꿈을 꾸시는 주선애 권사님! 삼가 평안을 기원하며, 필자는 찬송가 490장을 화답송(和答頌)으로 올려드린다.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고무송 목사 / 한국교회인물연구소 소장·전 본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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