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소주 한 병만 사다주시면 안 될까요?
[ 목양칼럼 ]
작성 : 2019년 11월 01일(금) 00:00 가+가-
수요 저녁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가족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며칠 전 수술을 마친 후 경과가 좋아서 내일 퇴원할 예정인 교우였기에 '혹시 수술부위가 안 좋아져서 전화하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 전혀 예상치 못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목사님 빨리 소주 한 병을 사서 지금 저희 집에 좀 가주시면 안 될까요?" 충격에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머뭇거리다가, 술심부름을 부탁하는 연유를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교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알콜중독 치료를 받고 오랜 시간 입원해 있다가 얼마 전 퇴원해서 집에 혼자 있는데 이 밤에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혼자 휠체어를 타고 술을 사러 나가려고 고집을 부리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누가 말려도 분명 혼자 술을 사러 나갈 텐데 너무 위험하니 사고가 나지 않게 목사님이 대신 술 한 병만 사다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한다.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계속 고집을 부려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아니 목사를 어떻게 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다시는 그런 부탁을 못하도록 혼내줘야겠다 마음 먹은 순간, 또 다른 소리가 마음 속에서 들려 왔다.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목사에게 전화를 했을까?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남편 분을 만나 뵙고 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밤새 술을 사러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술을 사다 드리는 것은 할 수가 없으니 정 술이 필요하다면 아파트 경비실에 부탁을 드리던가, 친지에게 부탁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아무 말 없이 바로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는 문자가 하나 왔다. '목사님 제가 너무 큰 실수를 했지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이 문자를 보는 순간 참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얼마나 당황하고 급했으면 내게 다 전화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병원에 누워서 남편 생각에 잠 못 들고 있을 그 교우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파왔다. '아직도 내가 목사로서 멀었구나. 목사가 뭐라고 아직도 목사로서 내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에 짜증과 분노가 올라오는구나!'라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휠체어를 타고 계신 그 남편 분을 찾아가 만나 뵙고 조용히 기도해 드리고 다시 돌아왔다.

예수님은 분명히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수없이 교우들 앞에서 이 내용을 설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는 목사로서 섬김 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꿈틀대고 있음을 주님께서는 '소주 한 병 사건'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해주셨다. 술 취하지 말고 마시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만 알았지 그 명령 속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주님의 마음, 즉 술 취한 사람과 술로 파괴된 가정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을 나는 놓쳤던 것이다.

이제 다시금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웃는 자들과 함께 우는 참된 목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백종욱 목사/송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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