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섬에서 죽게하소서!" 그후 40년
[ 흔적을찾아서 ]
작성 : 2019년 10월 15일(화) 13:21 가+가-
9.형도교회 이동목 목사와 자녀들을 찾아서(上)

이황순 여사의 79회 생신축하예배에 참석한 이동목 목사의 가족들과 필자.

이동목 목사와 이황순 여사.
모처럼 반가운 손님이 필자의 페이스북을 방문했다.

-정호상: 고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궁금하던 차 '한국기독공보'에 연재하시는 '흔적을 찾아서'를 통해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페이스북 한국교회인물연구소 그룹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의 인물들을 더 알아가고 싶습니다.

-고무송: 참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1992년 총회파송 선교사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떠나셨으니까, 30년 세월이네요. 선교현장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만, '님은 먼곳에' 계셔서 찾아뵙질 못하고 있네요. 한국교회 인물들을 더 알아가고 싶다고요? 요즘 소개할 만한 인물이 마땅찮아 연구소가 개점휴업 상태랍니다. 어쩌지요? 아, 마침, 엊그제 '빛과소금' 창간호(1985년 4월)에 소개했던 '이 섬에서 죽게하소서'의 주인공 이동목 목사님 내외분과 5남매(1녀 4남) 가족들을 만났네요. 아버지 사역을 이어 차남 이병승 목사님이 대전 변두리에서 '은샘교회'와 '은샘공동체'를 운영, 현재 중증장애인 10여 분을 모시고 삶을 공유하는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이동목 목사님과 그분의 자녀들이야말로 이 시대를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감히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이동목 목사, 그는 누구인가?

이야기는 1980년대 초반을 소환한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됐던 시절, '연예인교회'를 개척했던 하용조 목사가 건강 문제로 사임하고 선교단체 '두란노서원'을 설립,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행했던 선교활동을 20세기 서울에서 펼칠 것을 선언했다.

-'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이 서원에서는 사도행전 19장 8~20절의 가르침대로, 첫째 복음 앞에 헌신된 일꾼을 따로 세워 훈련하는 제자양육 사역, 둘째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게 하는 사역, 셋째 세계선교의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는 두란노세계선교 사역, 넷째 인간의 질병과 가난 그리고 사탄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 사역, 다섯째 예수문화를 위한 연극 음악 미술 출판과 매스콤 선교사역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때 MBC로부터 강제 해직을 당한 필자는 불혹지년(不惑之年)에 소명(召命)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 40대에 전도사 신분으로 두란노서원 장학생 및 스탭으로 신학공부를 병행했다. 당시 신촌역 부근에 위치한 두란노서원은 신앙서적 출판과 함께 밤마다 성경공부 공개강좌를 개설했다. 그때 매우 독특한 분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방금 고기를 잡던 현장에서 달려온 것 마냥 후줄근한 중년 남자. 그의 손엔 항상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그 속엔 오징어, 전어, 꽁치, 조개굴 따위 생선 잡어(雜魚)들이 들어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말씀을 어떻게 공짜로 들을 수 있겠어요. 변변찮은 생선입니다만, 오늘 낮 바다에서 잡아올린 싱싱한 것들이랍니다. 달고 오묘한 말씀을 주시는 하용조 목사님께 올려주시지요.

아, 얼마나 맑고도 고운 사람이런가! 그는 자신을 '섬마을 만년전도사'라 했다. 많은 이들이 비릿한 그 생선 냄새에 코를 쥐고, 더러는 눈을 흘기며 외면했지만, 필자에겐 향기로운 제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부턴가, 성경공부 맨 앞자리를 차지했던 '섬마을 만년전도사', 바로 그가 발길을 뚝 끊는 것이었다. 한 주일, 그리고 또 한 주일… 그렇게 두 달도 훨씬 더 넘겼을 것이다. 궁금해졌다. 그랬는데, 그가 불쑥 나타났다. 더욱 더 후줄근한 몰골로 말이다. 조용한 지하다방에 모셔 그간의 사정을 청취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 세상에 어째 그런 일이 다…

-죄송합니다.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성경공부에 빠졌습니다. 피치못할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큰 딸애가 바닷물에 휩쓸려 행방불명, 여러날만에 시신을 수습, 장례를 치르느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좋은 소식 드리지 못해 미안하고 송구스럽네요.

#"이 섬에서 죽게 하소서!"

그무렵, 3년 동안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하용조 목사는 문서선교를 위한 도구로 월간잡지를 발간키로 작정, '빛과소금'으로 제호를 확정, 필자에게 편집장을 맡기곤 창간작업을 독려했다. 월간 '뿌리깊은나무'가 장안의 지가를 높이고 있던 시절. 우리는 한국교회 속 뿌리깊은 나무를 만들자는 목표를 설정, 피현희를 비롯, 문동학, 김영호, 조인서, 유광준 등 민완기자를 선발했고, 원주연 편집실장과 사진작가 이남수를 '뿌리깊은나무'에서 스카웃, 편집진용을 완비했다. 발행인 최순영, 편집인 하용조, 홍정길을 비롯한 편집위원 등 막강(莫强) 황금배역. '한 사람을 찾습니다' 제하의 편집인 고정칼럼 '빛과소금의 생각' 한 대목을 되짚어 본다.

-빛과소금으로 사는 사람, 그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혹시 이런 분을 만나보신 일이 있습니까? 이 '한 사람'을 이 땅에서 찾아내고자 우리는 '빛과소금'을 열심히 만들고자 합니다.

'빛과소금'은 핵심 코너를 '빛으로 소금으로 칼럼'으로 설정했고, 집필은 편집장인 필자에게 맡겨졌다. 우리는 편집회의를 거듭했다. 빛과 소금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있는 '한사람'을 찾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한경직 목사를 위시한 거물급 명사들이 탁상에 올려졌다. 백가쟁명(百家爭鳴), 난상토의(爛商討議) 끝, 이동목 전도사로 최종낙점(最終落點)! '빛과소금' 창간호(1985년 4월/p.113) '빛으로 소금으로' (1) "이 섬에서 죽게 하소서" 칼럼(글 고무송·사진 이남수)을 펼쳐본다.

-1975년 4월 6일, 그러니까 만 10년전, 마흔살에 이동목은 전도사로 단신(單身) 이 섬에 상륙했다. 부인은 아이들 데리고 섬에 들어가는 게 싫다고 했단다. 그는 딸만 여섯을 둔 부잣집 막내 외아들로 감리교회 장로였다. 어쩌다 쉰살 이동목은 전도사로 변신, 서해낙도 형도(衡島)까지 밀려온 것일까?

필자 역시 자식을 둔 아비로서 참척(慘慽)을 당한 이동목의 쓰라린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레퀴엠(Requiem; 鎭魂曲), 그것이 '빛과소금' 창간호에 실린 "이 섬에서 죽게 하소서!" 현장리포트였다.

-이동목의 목소리는 고장 난 풍금처럼 음조(音調)를 잃어가고 있었다. 눈에 맺힌 이슬을 떨구기라도 하듯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돌린다. 30여리쯤 떨어진 저 너머에 대부도가 있고, 그 섬에 딸이 묻혀있는 것이다. 큰 따님 성애의 시신이 그곳 뻘밭 고랑에서 발견된 것은 한달이 훨씬 지난 뒤였다. 주일을 지켜야 된다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된다고, (토요일 밤에) 바닷물이 밀려드는 뻘밭을 건너오다가 그만이야 파도에 휩쓸린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동목 목사의 자녀들

큰 딸을 그렇게 보낸 이동목에겐 5남매가 남아있다. 언니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 장녀가 된 현애는 김종헌과 결혼, 해나, 예진, 혜지 세 자매를 둔 딸 부자. 생극감리교회 담임목사의 부인으로서 얼마전 출가한 맏딸 덕분에 듬직한 사위를 얻어 "큰 아들 맞았다"며, 함박꽃 미소 가득한 행복한 사모님. 이동목 목사의 장남 병설은 은행원 남은미와 결혼, 우영, 유진 남매를 두었으며 '이레자동차공업사'를 운영, 불황을 모르는 인기 절정의 최고경영자. 2남 병승은 고교 과학교사 김영혜와 결혼, 우성, 우현, 우찬 세 아들에 막내딸 은샘을 두었다. 그는 대전침신대 정두영 교수 문하에서 플룻을 사사했고 신학을 전공,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 대전 변두리에 은샘교회를 개척, 목하 공동체 사역에 몰두. 3남 병억은 병원 사무장 서은주와 결혼, 우민, 은서 남매를 두었으며,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미용실 '조이헤어'는 역시 인기리에 목하 성업중, 거액(?)의 십일조를 형도교회에 헌납, 아버지 사역에 든든한 물주(物主). 유일한 형도 태생 막내 아들 병민은 마산초등학교 형도분교 출신으로 목원대 음악교육과를 거쳐 이태리에 유학, 제노바음대에서 수학, 8년만에 세계적인 바리톤 가수로 금의환향, 사회복지사 전영주와 결혼, 우주, 우인 두 아들을 두었으며,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는 바리톤 유망주(有望主). 그러니까 이동목 목사 부부 슬하엔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손녀사위 등 도합 24명의 막강(莫强) 십자군(十字軍) 대군단(大軍團)이 있는 것이다!

-5남매 자식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못난 애비를 만나 온갖 고초를 겪게 했습니다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꿋꿋이 살아가고 있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 보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내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獻身)입니다. 못난 남편 따라 낙도에 들어와 모진 고생 끝에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몸이 됐지만, 기도의 어머니로 저희 가정을 일으켜 세운 장부(丈婦)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특별히 보내주신 아주 고맙고도 고운 천사랍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이동목을 기억하십니까? '이 섬에서 죽게하소서!'의 주인공 이동목 목사. 그분의 아내 이황순 여사의 79세 생신축하예배 설교차 대전을 방문, 자녀손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지금 야간열차로 상경중입니다. "주여, 의인의 자녀들을 축복하옵소서!" 아멘!!

KTX 행신행 야간열차 속에서 필자의 페이스북 그룹 '한국교회인물연구소'에 올린 짧은 글에, 민상기(드림북 대표)를 비롯 100명이 넘는 '좋아요' 팔로우! 전광석화(電光石火) 초(超)스피드 전자시대를 절감하던 그날, 이동목 목사는 굳이 아내의 생신축하예배 설교자로 필자를 지목, 강제 소환(?)한 것이었다. 그와 나, 우리 두 사람은 40년 전 '빛과소금' 취재차 인터뷰를 위해 회견기자(interviewer)와 피회견자(interviewee) 취재대상으로 만남을 가졌다. 결국 일 때문에 만난 것이었다. 필자가 그렇게 만난 인물들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는가. 그랬는데, 이동목은 달랐다. 일 속에서 서로가 경모관계(敬慕關係)로 승화, 그렇게 반세기를 지내오면서 필자는 이렇게 이동목 목사 가정의 대소사(大小事)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한 가솔(家率), 한 식구(食口)가 된 것이다.

그날, 이동목 목사 가정의 온 식구들은 차남 이병승 목사가 대전 변두리에 개척한 '은샘교회'와 부설 '은샘공동체'에 모여 이황순 여사의 생신을 축하했다. 필자는 시편 133편을 본문으로 '형제가 연합하여' 제하의 말씀을 증거했다. 그러면서 문득, 시편기자의 그 말씀은 바로 이동목 목사의 가솔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나누고 더불어 찬양하며 예배 드리고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이 가정을 지켜보면서 읊조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것이었다. 여기가 천국 아니겠는가! 아, 이동목 목사, 그대는 참으로 행복한 하나님의 종이로소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1,3b).

글·사진 고무송 목사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전 본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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