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주에 대한 현재 가정법
기독교 문학 읽기(11) 구병모, 방주로 오세요
작성 : 2019년 10월 09일(수) 10:00 가+가-
세상에 닥친 대홍수 앞에서 노아의 방주는 구원과 소망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생명체의 희망이었던 방주는 이 시대의 가정법에 따라 소수가 선택한 불평등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구병모(1976~ ) 작가의 소설 '방주로 오세요'에서는, 어느 날 지구에 커다란 운석이 떨어지고 그것이 떨어진 자리에 높이 1.2㎞, 넓이 39.5㎢의 언덕이 생겨 미래의 도시가 만들어진다. 이 넓이는 서울의 강남 지역 면적과 일치하기 때문에 작가가 상상력의 근거를 무엇에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도시는 선택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기득권이 만들어낸 이 초호화도시는 돔으로 밀폐되고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도시의 이름은 '방주시'이며 거기에 '방주고등학교'가 있다. 선택된 학생들만 다닐 수 있는 방주고등학교에 지상의 아이들이 입학하려면 성적, 인품, 환경 등을 철저히 검토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정원의 10%를 채우게 되는데, 이는 방주의 지위와 권력을 받들어줄 사람들을 지상에서 뽑아 올리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 사회 문제로 떠오른 특목고나 자사고의 현실과 겹치는 대목이 없지 않다.

이 시대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방주시와 방주고의 정체성이 모두 기독교와 관련되게 그려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노아의 방주를 화소로 내세웠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정체성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가 기득권 세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살펴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 소설의 머리에 나오는 방주시 시장의 연설은 겸손을 가장한 새로운 권력의 등장 선언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은 벌을 내리셨지만, 우리는 발전된 기술력을 응집하여 폐허가 된 땅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바벨탑처럼 어리석은 꿈을 꾼 게 아니라 주께서 내리신 시련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새로 만들어주신 땅에 온전히 주의 뜻에 맞는 소박한 터전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 이 도시를 이룩했습니다."

방주고 역시 이런 정신을 표면에 내걸고 있는 기독교 학교이다. 때를 맞춰 예배드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 이름도 성경에 있는 명칭 일색으로 되어 있다. 단체 규율이 생명인 기숙사 이름은 '데칼로그(십계명) 관', 체육관은 '하나님의 강대한 힘'이라는 의미의 '히스기야 관', 식당은 '오병이어 당', 도서관은 '코헬레트(전도서) 관' 등이다. 또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도 성경 구절과 정확히 일치할 만큼 형식적 완전성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이 도시와 학교는 진정한 낙원이 될 수 없다. 그곳은 이분법적 논리로 우열을 갈라놓으며 거기서 권력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절망적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주인공은 지상의 아이로서 첫사랑을 찾아 방주고에 입학한다. 첫사랑의 대상이 겉모습을 바꾸는 바람에 오해를 거듭하며 혼란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방주고를 폭파해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학생 시온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방주를 지키려는 세력과 폭파하려는 세력의 격렬한 대립을 보며 그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 일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시온은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나 작가는 방주를 부수려는 계획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여지를 남겨둔 채로 작품을 마친다. 과연 이 시대의 방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구병모 작가는 청소년문학상을 받았고, 청소년층의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는 청소년 독자들과 함께 교회라는 방주에 들어와 사랑을 찾으려 하고, 고정관념을 바꾸기 원하며, 낙원과 디스토피아의 대립 속에서 고통을 나누는 중이다. 그리고 방주의 의미가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며 문학적인 유예 기간을 주고 있다.



김수중 교수/조선대 명예교수, 동안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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