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파괴주의 vs 성상옹호주의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19년 09월 27일(금) 00:00 가+가-
<6> 성상파괴 논쟁
성상파괴 논쟁

그리스도교 신앙과 예배에서 성화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과 논쟁이 있어 왔다. 특히 726년 동방의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가 성상파괴 법령을 공표하면서부터, 843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메토디우스(재위 843~847)가 성상옹호를 합법이라 선포하고 성상파괴자들을 정죄하기까지 무려 117년 동안 소위 '성상파괴 논쟁'(Iconoclast Controversy)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성상파괴자들(Iconoclasts)은 그리스도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면 그분의 신성과는 동떨어진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을 왜곡하거나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이 볼 때 성상옹호자들(Iconophiles)은 곧 성상숭배자들이었고 결국은 우상숭배자들로밖에 볼 수 없었다.

반면 성상옹호자들은 성화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것이라며 예배와 생활에서의 성화상 사용을 옹호했다. 이들은 '라트리아'(latria: 숭배)와 '둘리아'(dulia: 공경)라는 단어의 차이를 들어, 하나님께는 예배와 숭배를 돌림이 마땅하고 성화상은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하지만 성상파괴자들에게 이러한 구분은 일종의 말장난으로 들렸다. 성상파괴자들이 볼 때, 성상옹호자들의 주장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만연한 성화상 숭배 관습을 정당화하고, 성화상을 만드는 도상학(iconography)으로 수도사들이 취하는 경제적 이득을 지키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성상옹호자들의 대변인은 단연 다마스쿠스의 요한(675~749)이었다. 그는 '성상파괴자들을 반대한 강화'에서 예배에서 성화상을 사용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성상옹호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인간과 함께 사시고 육신의 온갖 성품과 체질과 모양과 색깔 전부를 취하신 성육신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전혀 잘못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상옹호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상옹호는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오히려 성화상은 '하늘로 들어가는 창문'이며 '문맹자들을 위한 책'이고, 은혜의 통로로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고 논증했다.



히에리아공의회(754) vs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

황제 레오 3세는 성화상 숭배의 관습이 황제숭배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을 우려해 726년 제국 내의 모든 성화상 제거를 명령했다. 레오 3세를 이어 황제가 된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상파괴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황제는 754년 2월 10일 칼케돈 근처 히에리아 궁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도록 유혹한 자는 사탄이며, 모세의 율법도 예언자들도 이러한 파멸의 소굴을 만들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 있다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뿐이며, 이것 외의 다른 어떤 형식으로도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성상옹호를 부추기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을 저주하는 문장을 결의문에 삽입했다. 이제 성상파괴주의가 정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전되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재위 775~780)가 집권 5년 만에 사망하자 겨우 열 살인 콘스탄티누스 6세(재위 780~797)가 황제의 직위에 올랐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황후 이레네가 섭정을 시행하였고, 황후는 성상파괴 정책을 철회하고 성상 공경을 옹호했다. 그녀는 서방의 교황 하드리아누스(재위 772~795)에게 대사를 파송하여 동서방의 화합을 위한 공의회를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787년 9월 24일 300여 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2차 니케아공의회가 개회되었다. 325년 1차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후 462년 만에 다시금 니케아에서 두 번째 보편공의회가 열린 것이다. 이 회의의 주된 의제는 '예배에서 성화상을 사용해도 괜찮은가?'라는 논쟁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공의회가 내린 결론은 성화상을 공경하는 것은 성화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실체를 존중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화상에 대해 적절한 공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성화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노라. 성스러운 성화상을 우상이라 부르는 자들을 저주하노라"고 선언했다. 이 공의회로 인해 이제는 성상옹호주의가 정통이 되었다.



2차 니케아공의회의 결정 이후

하지만 2차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이 성상파괴 논쟁의 최종 결론은 아니었다. 서방의 프랑크 제국 황제 샤를마뉴는 동방의 황후가 주도하여 결정한 것을 서방에 강요하는 데 대해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했다. 동방에서도 레오 5세(재위 813~820)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성상파괴 정책을 채택하고, 성상옹호론자들을 추방하고 단죄했다. 그리고 2차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성상숭배를 금지했던 히에리아공의회의 입장을 또다시 정통 신앙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레오 5세는 820년 반대 세력에 의해 하기야 소피아 교회당의 제단 앞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메토디우스가 성화상 공경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임으로써 1세기 이상 지속된 논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상파괴 논쟁은 정치적으로는 황제의 권력이 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선례를 남겼고, 신학적으로는 성화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일으켰으며, 예술적으로는 성상파괴주의로 인해 예술 활동의 위축과 약화를 초래했다. 8~9세기 격렬했던 성상파괴 논쟁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이 문제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이미지 사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박경수 교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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