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
[ 주간논단 ]
작성 : 2019년 09월 17일(화) 10:00 가+가-
바른 생활 경험을 가진 평범한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인가? 직면하게 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온갖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인가?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대체하고 이성적 비판이 아닌 맹목적 비난이 판을 치는 요즈음 청문회 관련 사건과 보도들을 접하면서 가졌던 질문들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나섰던 사람이 혼외 자 문제로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공적인 영역에서 회자되자 후보 자리에서 자진 사퇴하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공직자에게 바라는 기준이 꽤 엄격히 지켜지는 것을 보면서 상당히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사회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에서 지도자와 관련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일들과 '정의(justice)'는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덮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정의의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정의롭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란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앙은 정의를 요구한다는 이 가르침이 바로 신앙의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명령이다.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미쉬파트는 구약 성서에서만 422번 사용되었으니 중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구약 성서 전체가 정의에 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미가서 6장 8절 '정의를 행하며'에서 '행하다'는 히브리 동사 아사의 어원은 '행하다'와 '만들다'의 두 단어를 결합한 것이다. 결국 '정의를 행하라'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공동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행하는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샬롬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반자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의에 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권리, 재화, 책임감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관계된다. 좀 더 구분하자면 사적인 집단이나 개인 간의 모든 거래에서 정직과 공정함을 요구하는 교환 정의, 사회가 그 사회적 물자, 즉 문화, 경제적 부, 정치권력이 공정하게 분배되었는지를 보증하는 것을 요구하는 분배 정의, 그리고 사회가 모든 이의 존엄성을 지키며 각 구성원이 필요와 재능, 선택에 따라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창출해내는 책임과 관련되는 사회 정의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사회 정의는 성, 인종, 민족성, 계층, 혹은 조건 등에 근거한 차별을 용납하지 않으며, 개인을 착취하거나 완전한 사회 참여에서 배제시키는 모든 법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배격한다. 그래서 정의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기준에 의한 차별에 관해 대담하게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용기, 행동,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을 수반한다.

그런데 때로 사람이 오랫동안 환대를 받다 보면 마치 그것이 자신의 특권인양 착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을 오랫동안 통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치 우리 것 인양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속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따라서 무엇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가려내고 그것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 필요하며, 그것은 바로 사랑의 행위이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정리하고 그것을 분류해서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주빌리(jubilee) 정의이기도 하다.



김은주 교수/한일장신대학교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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