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찾아서 떠난 순례자
7.한국개신교 최초순교자 토마스목사의흔적
작성 : 2019년 09월 11일(수) 14:26 가+가-

한국개신교 최초순교자 토마스목사(Robert. J. Thomas1839-1866)

2001년 총회농어촌부 북한교회지원단 평양 칠골교회 방문.
'격침기념비' 앞에 선 필자(평양 2001년)
'격침기념비' 앞에 선 필자(평양 2001년)
역사신학자 임희국 교수(장신대)는 필자가 한국개신교 최초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연구, 정리한 논문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고무송은 영어로 작성된 박사학위논문을 우리 말로 번역해 단행본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을 출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토마스 연구는 여전히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자평했다. 그가 논문을 마감할 때(1995년)까지도 순교현장인 평양을 답사할 수 없었던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토마스에 관한 최초의 박사학위(Ph.D) 논문이기에, 후학들에 의해 보다 더 깊은 연구가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뜻이 '미완성'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 연구의 순례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졸저, 토마스찾아삼만리, 드림북, 2013, pp.14-15)

'미완성'의 논문이었지만, 신학생들에게 '토마스 순교정신'을 전수하도록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은 필자를 겸임교수로 초빙했으며, 효율적인 강의를 위해서 그때 수강생이었던 강주호 전도사(현재 미국 뉴욕신광교회 담임목사) 내외가 필자의 논문을 번역, 본서를 상재(上梓)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인생, 그것은 어쩌면 토마스를 찾아 떠난 순례여행이었습니다. 연구를 시작했으나 이내 벽에 부닥치고 말았습니다. 토마스에 관한 자료가 희귀했습니다. 결국 연구논문은 토마스의 흔적을 찾아 그의 체취를 느끼며, 그와 대화하고, 묻혀 있는 자료를 발굴하는 순례여행,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고향마을 웨일즈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공부했던 런던, 선교사로 사역했던 중국 샹하이, 산동반도, 북경을 거쳐 그가 타고 왔던 제너럴셔먼호의 흔적을 추적, 미국의 여러 대학 도서관과 기관들의 고문서보관소(archives) 등. 그것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편린처럼 세계 도처에 흩어져있는 토마스의 분신과 같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는 순례여행이었습니다.(중략) 영어로 된 어줍잖은 논문을 미려한 우리 글로 아름답게 번역해 주신 강주호 전도사님과 박미현 사모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졸저,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강주호 박미현 번역), 쿰란출판사, 2001, pp.1-3)

#평양의 토마스 흔적1: '샤만호 격침비'

임희국 교수의 논평 그대로, 1995년, 필자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현장인 평양을 답사하지 못한 채 연구논문을 마감해야 했다. 당시 북한을 방문할 수 없는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2001년, 필자는 총회신문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재직시 총회 농어촌부 북한교회 지원방문단(단장: 안영로)과 함께 조선그리스도교연맹(당시 위원장: 강영섭)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때,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배려로 대동강변에 세워진 이른바 '미해적선 샤만호 격침 기념비'를 답사할 수 있었다. 그날 토마스 목사 순교현장에 세워놓았다는 그 '격침비'를 참관하던 순간의 착잡했던 감회를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동안 남북화해 무드가 고조됐던 것과 대조적으로 냉각기에 접어든 요즘, 한반도의 상황을 감안할 때, 필자의 마음은 불현듯 평양 대동강변으로 날아가, 거기 커다란 돌비석 앞에 망부석처럼 멈춰서야만 했던 그날로 회귀하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깎아 음각으로 새겨넣은 비문에 시선이 꽂힌다. 그 비문 속에 새겨진 낯선 이름, 그는 또 누구란 말인가? 돌비에 어른거리는 흔적은 숱한 의문을 필자에게 던져주는 것이었다.

#미해적선 샤만호 격침기념비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응우 선생을 비롯한 평양 인민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미 해적선 샤만호를 천팔백륙십륙년 구월 이일 대동강 한사정 여울에서 격침하였다. 천구백륙십륙년 구월 이일.

1866년(고종 3년), 평양성에 출현한 제너럴셔먼호(The General Sherman). 미국 국적의 상선으로 조선과의 통상목적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을 찾아들었다 했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은 물론 선박조차 출입을 봉쇄, 평양성과 제너럴셔먼호 쌍방간 교전, 그 배는 불에 타 대동강에 수장됐으며, 선원 24명 전원 희생의 참극을 빚었고, 그로부터 100년이 경과한 1966년 9월 2일, 북한은 사건현장 대동강변에 이른바 '미해적선 샤만호 격침기념비'를 건립했던 것이다.

동시통역사(interpreter)와 수로안내인(navigator)으로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던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Rev.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의 흔적을 찾아서 그의 발걸음이 머물렀던 지구촌 구석구석을 답사했던 필자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관한 사실(事實)을 역사적 사실(史實)로, 그리고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진실(眞實)로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했거늘, 이제 대동강변 거대한 돌비석 앞에선 필자는 그 흔적 속에 깃든 미스터리를 또 다시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새로운 과제를 대면케 되는 순례자의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허허로울 뿐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9월 2일,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군의 화공법(火攻法) 공격으로 대동강에 수장, 승무원 24명 전원 희생이라는 참사가 빚어졌거니와 희생자 명단에 토마스가 등재된다. 그는 영국인 목사로서 다량의 한문성경을 탑재,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탑승했던 런던선교회(LMS: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였던 것. 그럼에도 북한측 자료엔 토마스의 국적이 미국으로 돼 있다는 사실.

-이때 미국 침략자들의 특무로서 최란헌이란 조선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기여든 미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란 놈이 통역으로 나서서(조선전사13 제2장 제1절,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0, p.70)

더욱 난해한 대목은, 어떤 역사기록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인물이 불현듯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해적선 샤만호가 우리 조국 강토에 기여들어 왔을 때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는 원쑤를 쳐물리치기 위한 싸움의 선두에 나서시여 인민들에게 오만한 침략자들과의 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 것을 절절히 호소하시였다.(같은책 p.76)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응우 선생님'은 정사(正史)는 물론 야사(野史)에도 발견되지 않는 인물. 북한측 자료는 그가 '김일성의 증조부'라 밝히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격침비에 새겨진 불가해(不可解)한 기록(記錄)의 전후 사정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심각한 역사 조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은 조선에 배상을 요구했으며, 이에 불응하자 조선을 공략,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1871년(고종 8년) 야기된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애당초 상대가 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미 해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광성진 등 요새를 점령했고, 조선군은 어재연(魚在淵)이 백병전으로 미군측에 맞섰으나 극미한 사상자를 냈을 뿐, 참패였다. 그럼에도 '전승'을 선포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 서울을 비롯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했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는 것,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꼴이 된다.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洋夷侵犯非戰(미표기한자)和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과 선교활동

지난한 교섭과정을 거쳐 1882년(고종 19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조선전권대사 신헌(申櫶)과 미국 전권공사 슈펠트(Commodore R.W.Shufeldt)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구미 제국 가운데 처음으로 조선이 체결한 조약이며, 제너럴셔먼호 사건 발생 16년만의 일이다. 한미 두 나라 사이 체결된 전문 14조 조약문 가운데 우리는 다음 항목들을 주목하게 된다.

-제4조: 조선체류 미합중국 민(民)은 조선정부 지방관으로부터 생명, 재산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어떠한 종류의 기능(欺凌:기만과 능욕)과 손훼(損毁)로부터도 보호를 받는다.

-제14조: 양 조약국은 이후에 조선국이 어느 때든지 어느 국가나 어느 나라 상인 또는 인민에 대하여 항해, 통상, 정치, 기타 어떠한 통교에 관련된 것임을 막론하고 본 조약에 의하여 부여되지 않은 어떤 권리 또는 특혜를 허가할 때에는 이와 같은 권리 특권 및 특혜는 미국의 관민상인(官民商人)에게도 무조건 균점(均霑)된다.

조약 명문에 의거,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실제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 민간인의 조선에의 입국과 거주, 활동은 물론 재산취득이 가능케 됐으며, 이로 인하여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합법적(合法的)인 조선입국 허용은 물론 선교활동을 보장받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발생 16년만에 거둬진 결과물이요,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제물이 됨으로써 맺혀진 열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토마스 목사의 출생으로부터 성장과 교육 그리고 선교사역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흔적을 찾아서 선교신학논문으로 매듭을 지었다. 비록 어줍잖은 탐색이었지만, 27세 토마스 목사의 젊은 죽음은 결코 도로(徒勞)가 아니요,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순교(殉敎; martyrdom)라는 사실(事實; fact)을 규명, 역사적 사실(史實)과 선교학적 진실(眞實)로 정립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개신교 한국선교의 단초(端初)를 이루는 사건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1884년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Dr. 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합법적 조선입국을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산점(起算点)으로 획정하고 있는 바, 이는 1866년 토마스의 조선 입국 및 순교로, 18년 앞당기도록 수정돼야 마땅한 것이다. 토마스 목사야말로 조선을 향하여(To Korea), 조선인을 위하여(For Koreans), 조선의 제단(Of Korean Church)에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이 땅에 풍성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한 썩는 밀알,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토마스 목사의 흔적을 찾아서 길 떠난 순례자는 주님의 말씀을 연구논문의 결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글·사진 고무송목사 /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전 본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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