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당회와 삼각관계
작성 : 2019년 09월 13일(금) 00:00 가+가-
김 장로는 정책당회에서 새해에는 찬양대의 솔리스트를 없애고 자원봉사자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 예산을 절약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 봉사는 순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평소에 김 장로와 친하게 지내던 박 장로가 다른 의견을 냈다. 솔리스트의 신앙이 왜 순수하지 않느냐며 맞받아쳤다. 교회 음악의 미래를 위해 교회가 이들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곁에 있던 이 장로가 즉각 말렸다. 왜들 그러느냐고 싸우지 말고 좋게 좋게 해결하자며 중재에 나섰지만, 두 사람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10월은 정책당회를 하기에 적합한 시기이다. 새해를 두 세달 앞두고 준비하며 교회의 상황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정책당회는 이제 거의 모든 교회에서 하는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목사와 장로들이 함께 모여 열띤 논의를 하다 보면, 뜻을 모아 하나가 되기는 커녕, 믿는 자가 그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지고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는 일이 생긴다. 교회 안의 모든 모임들의 대표격인 당회가 화목하여 하나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성도들의 모임들이 은혜롭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담임목사가 정책당회를 평안하고 생산적인 모임으로 만들 수 있을까?

세 사람을 놓고 삼각형을 그려보면 의외로 쉽게 문제를 파악하게 되고, 해결책도 보인다. 원래 모든 인간사회가 수많은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관계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이 아니다. 삼각관계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을 때는 둘만의 관계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삼각형이 생기게 된다. 앞의 이야기에서도 김 장로와 박 장로의 갈등이 이 장로의 개입을 불렀다. 김 장로와 박 장로는 서로 대립되어 관계에 금이 갔다고 느끼는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내 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곁에 있던 이 장로는 둘이서 다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즉각 중재를 하든지 한쪽 편을 들든지 하여 자연스레 둘 사이에 개입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해서 삼각관계는 즉시 만들어진다. 이런 삼각관계는 우리 주변에 수도 없이 만들어졌다 사라지곤 한다. 우리가 이 삼각관계의 역동을 조금만 이해하면 우리는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삼각관계에는 많은 법칙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오늘 소개할 첫 번째 법칙은 삼각형의 필수성인데,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두 사람의 갈등은 반드시 세 번째 사람의 개입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법칙은 삼각형의 가변성인데, 삼각형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A와 B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키면, 그 중 한사람 B가 C를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 자연히 C는 A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로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B가 C를 끌어들였을까? 그 목적은 C를 자기 편으로 만듦으로써 A와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가진 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사실 깊은 심리적 욕구는 다르다. B가 A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는 화해할 수 없어서 C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처럼 삼각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이런 A와 B사이의 갈등에 개입되는 C가 되기 쉬운 사람이 교회에서 누구일까? 다름 아닌 담임목사다. 왜일까? 성도들은 목사가 중재해 주기를 기대하고, 목사도 그들의 불화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회를 평안하게 지도하고 이끌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삼각관계에 빠져들기가 쉽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자. 정말 성도들의 불화는 목사의 책임일까? 목사가 중재하면 쉽게 화해될까? 그렇지 않다. 중재해도 본인들이 원치 않으면 화해 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불화는 그들의 책임이다. 목사의 책임은 하나 되게 하신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믿는 자가 화평케 할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갈등을 중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말인가요?" 맞는 말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무작정 개입하여 내가 화해시키려 하지 말고 예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여기서 오늘의 세 번째 원칙이 나온다. 삼각형의 비상관성(非相關性)이다. 그림에서 C로부터 맞은편 A-B 관계로 향한 화살표는 C는 A-B 관계를 가깝게도 멀게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관계는 당사자인 그들 자신만이 다룰 수 있다. C가 다룰 수 있는 관계는 단지 B-C 와 A-C 뿐이다. A-B는 C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A-B 관계를 어찌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탈진(Burnout)하고 만다. A-B 관계는 그들 자신들에게 맡기고, 목사가 할 수 있는 B-C와 A-C의 관계에 힘을 써야 한다. 만약 C가 이렇게 노력하면, A-B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주게 된다. 우리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대화하자.

우리가 잘 아는 간음 중에 붙들린 여인 이야기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끌고 와서, "율법대로 돌로 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바리새인(A)과 죄인(B)의 갈등이다. 바리새인은 예수님(C)을 끌어들여 비판하고 시험함으로써 삼각관계를 만들었다. 보통 사람은 이럴 때 죄인(B) 편을 들어 바리새인을 꾸짖으려 하든지, 바리새인 편을 들어 죄인을 정죄하든지 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그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땅바닥에 글을 쓰고 계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삼각관계에 빠지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들 곁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지켜보시며, 자신이 하실 일을 하신다. 서로 사이의 시간적,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가지신다. 그들이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 할 때, 비로소 대화로 자신의 내면을 보여 주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둘 돌을 버리고 돌아갔다.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유케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삼각관계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빠져 있는 곳을 바깥에서 볼 수 있는지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화해와 평화를 주는 사랑을 배운다. 오직 예수의 평화와 사랑만이 우리를 삼각관계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다. 그 사랑으로 가득한 정책당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황영태 목사/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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