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를 만들고 있는가
[ 논설위원칼럼 ]
작성 : 2019년 09월 09일(월) 00:00 가+가-
누구나 공감하듯이, 지금 세상은 옛날에 비해서 여러모로 많이 좋아졌고 또 편해졌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렇다.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누가 때리거나 못살게 굴지 않는다. 감옥에 잡아 가두는 일도 없다. 한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목숨을 내건 일일 수도 있었다. 초대 교회 때나 일제 시대 또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자 굴도, 십자가형도, 모진 고문도 없다. 누가 뭐라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내 방식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별다른 고통도 압박도 받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지 먹을 수는 없는 해로운 버섯일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살이의 편함과 교회 생활의 즐거움 자체가 우리를 해치는 독버섯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세상이 편해지고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기독교 신앙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세상이 힘들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고 주님을 만나고자 했다. 사실이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핍박과 환란 또는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 성장한다. 처음에 열두 제자들로서 시작했던 초대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그들이 당하던 극심한 박해에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다. 핍박이나 고난을 찾아보기 어렵다. 설령 있다 해도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즐겨 십자가를 찾는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조차도 귀찮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이 노아의 날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마 24:37~39)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말씀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등 세상적인 즐거움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모든 것이 한없이 편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길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할 때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그는 세상적인 즐거움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깨어 근신할 줄 아는 의인(義人)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독버섯 같은 그 시대의 문화를 앞질러 보고 있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방주는 히브리말로 '테바'로서 '상자(box)'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방주의 향방(向方)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노아는 방주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지 방주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릇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은 삶의 바다 위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확고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뿐만 아니라 편하고 즐거울 때에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한다. 환란과 고통은 성도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웬만큼 성공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 만족과 풍요의 때에도 경성하여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와 같이, 우리도 평안하고 즐거울 때일수록 더욱 열심으로 주님을 찾고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범사에 철저하게 주님을 신뢰하는 자라야 슬기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강성열 교수/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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