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가장 진지한 독립투쟁의 협의처였다"
남대문교회와 새문안교회
작성 : 2019년 08월 27일(화) 10:58 가+가-
한국교회에는 나라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한 역사적 DNA가 흐르고 있다. 100년 전 기독교인들은 앞장서 항일운동을 펼치며 3.1운동 초기부터 큰 역할을 감당해 왔고, 이렇게 교회와 기독교학교를 기반으로 주도한 독립운동은 당시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우뚝 서게 했다.

3.1운동의 자취는 지역교회들의 교회사, 사료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서울·경기지역은 전국 3.1운동의 중심지였고 교회와 기독교학교,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던 주역이었다. 서울지역 교회 중 안동교회, 연동교회의 독립운동을 살핀데 이어 이번호에서는 남대문교회(손윤탁 목사 시무)와 새문안교회(이상학 목사 시무)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더듬어본다.

뒷줄 좌편부터 서병호, 김일, 김규식, 원한경./새문안교회 제공


# 나라와 민족의 고난을 함께 한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청소년기에 새문안을 거쳐간 안창호를 비롯해 파리강화회의 특사이며 임시정부의 지도자였던 김규식 장로, 독립협회 총대위원이었던 장붕 장로(후에 목사), 상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한 서병호 장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한 김순애 권사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해냈다. 김규식과 서병호는 동서간이었고, 김순애의 오빠인 김필순도 조기에 망명하여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이나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새문안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의 열망이 '3.1독립운동'이라는 꽃으로 피어난 배경에는 파리강화회의와 신한청년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했던 투사들 중 여럿이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독립운동가 서병호 장로의 손자인 서원석 원로장로는 "1918년에 파리강화회의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당시 상해에 망명해있던 여운형, 서병호, 김규식, 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만든다. 파리로 가기로 한 김규식은 국내에서도 뭔가 운동이 일어나 힘을 뒷받침 해줘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1919년 1월 선우혁, 서병호가 선천에 있는 양전백 목사를 만나러 가 일을 도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병호와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형부와 처제 사이로 중국인처럼 변복을 하고 국내에 잠입해 3.1운동 봉기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국내에 알리고 다녔다. 그러던 중 대구에서 2.8독립선언서를 갖고 들어온 조카 김마리아를 극적으로 만나게 돼 대구지역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뒷받침이 됐다.
'금번 구제 연보와 성탄비 절약금(節約金)을 합계하여 50원을 재옥(在獄) 교인의 가족에게 구조(救助)하기로 가결하다.'(1920년 1월 11일자 새문안교회 제직회록)

서 장로는 "결혼 보름 만에 남편인 김규식 박사는 파리로 가고, 김순애는 형부인 서병호와 함께 독립운동 활동비 모금과 만세운동에 대해 알리기 위해 잠입했다"며, "대구에서의 활동 이후 상경한 김순애는 3.1운동 준비 세력들이 연락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됐던 세브란스병원에 가짜 환자로 입원해 있다가 거사 전날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녀는 해방후에야 새문안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고, 초대권사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위험인물로 분류돼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들어왔을 때 정말 공포스러웠다고 회고하시는 것을 할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상해나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삶이었는지를 간혹 들려주실 땐 외롭고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고 했다.

3.1운동 당시 새문안교회의 항일 독립 운동과 관련한 사진과 기록들은 교회 1층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관에서 만날 수 있다. 월평균 3000여 명이 한국교회 역사교육의 순례공간으로 새문안교회를 찾고 있다고 했다.

출신 인물들의 걸출한 독립운동 활동 외에도 교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을 갖고 있다.
당시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기에 언더우드 후임인 쿤스 선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던 시절, 새문안교회 교인들은 집단으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투옥성도를 돕기 위해 헌금을 사용하기로 가결한 제직회록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무명의 성도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음을 엿볼 수 있다.

서 장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하던 때에 교회 제직회가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있는 일이었다"고 평가하며, "1920. 1. 11일자와 1921. 11. 6일자 두 군데의 제직회록이 교회가 재옥성도와 출옥성도들을 도운 유일한 기록들"이라고 설명했다.

담임 이상학 목사는 "새문안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교회학교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 다음세대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해답을 지나간 역사의 믿음의 선진들의 자취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민족의 아픔을 품어 안은 남대문교회
100년 전 독립선언을 하기 전날인 2월 28일 저녁, 세브란스의학교 4학년생이던 이용설은 교수였던 스코필드 선교사를 찾아간다. 이용설은 그에게 인쇄된 독립선언서 한 장을 건네주며, 백악관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인 3월 1일 아침, 세브란스 구내에 살면서 약제실에 근무했던 이갑성 집사도 그를 찾아가 그날 오후 2시에 있을 독립선언을 알리며, 독립만세 시위의 사진을 찍어 해외에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방에 배포하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다.

3.1운동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던 이용설(당시 청년부장)과 대구와 군산을 오가며 3.1운동을 전국 각 지방으로 확산시켰던 이갑성은 모두 남대문교회(당시 남대문밖교회) 교인이었다.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함태영은 1918년 4월에 남대문교회의 조사로 부임했다. 사형언도를 받은 이승만을 7년으로 감형시키고, 독립협회 이상재를 비롯한 17명에 대해 내란죄 대신 경미하게 처벌한 일로 법관의 일을 내려놓았던 때다. 이후 연동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한 함태영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봄, 남대문교회 조사로 부임해 담임교역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조사의 역할을 하며 3.1운동의 막후에서 거사가 있기까지 중요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함태영은 해방후 1946년 발간된 '신천지' 제1권 2호에서 3.1운동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기독교도들은 빈번한 연락계통을 가지고 집회를 가졌다. 외면으로는 어디까지나 예배였고 기도회였으나 그 내막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을 위한 무저항 투쟁의 구체적 합의였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의 연락장소는 교회관계의 예배당, 학교, 병원이었으며, 이런 곳은 가장 진지한 독립투쟁의 협의처였고,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들은 직접 독립운동의 내부조직에 지도자였다.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 학교교원, 전도부인들은 모두가 민족사상의 고취자였고, 신도와 학생들은 적극적인 애국자이며 열렬한 민족운동의 실천인들이었던 것이다."

함태영의 말처럼 당시 남대문교회는 3.1운동의 못자리 역할을 감당하기에 최적의 장소에 있었다. 세브란스 구내에 자리한 예배당은 지리적으로 선교사들이 관리하는 지역 안에 있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 손윤탁 목사와 100년 전 자리했던 세브란스 구내를 찾아갔다. 현재 3분의 1 정도의 부지가 남아있는 그곳에 지금은 세브란스빌딩이 자리하고 있고, 그 빌딩 지하에는 당시 세브란스의학교와 제중원, 제중원신앙공동체가 모체였던 남대문밖교회의 모형이 재현돼 있다.

손 목사는 "남대문교회는 교회와 병원, 학교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현장 속에 있었고, 이런 유기적 관계는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좋은 매개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남대문교회 교인들은 독립운동 후 투옥된 함태영 조사와 이갑성의 옥중투쟁을 격려하기 위해 주일예배가 끝나면 서대문 형무소 뒷동산에 올라가 찬송과 기도로 이들을 격려했고, 감옥에서도 박수로 응답하곤 했다는 회고가 교회사에 남아있다"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교회로서의 모습이 뚜렷했다"고 전했다.

빌딩 앞이자 지하철 서울역 4번 출구 앞 광장의 한 귀퉁이엔 3.1독립운동기념터를 가리키는 표석이 서 있다. 그 표석엔 '1919년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하던 곳'이라고 설명돼 있다.

이 자리에 서니 혹독한 일본의 탄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100년 전 그날들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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