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거들랑 군산에 묻어주오!"
7.미국남장로교 전킨(Rev. W. M. Junkin) 선교사 이야기
작성 : 2019년 08월 20일(화) 17:35 가+가-

전킨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1900년대).

군산 선교에 헌신한 미국남장로교 트리오 선교사.
#군산(群山): 일제강점기 대표적 수탈현장

-고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흔적을 찾아서' 애독자입니다. 전국 각지 유명 흔적들을 소개해 주셔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 목사님은 고향인 군산의 이 엄청난 '흔적'을 소개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딱들어 맞네요. 저는 전킨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입니다. 이사장 전병호 목사님을 비롯 추진위원들이 월요일 오전 고 목사님을 댁으로 찾아 뵙고 긴한 부탁을 드리자고 긴급결의를 했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충성!"

불문곡직(不問曲直) '충성!' 구호를 외치며 삼복(三伏)에 필자를 방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러잖아도 8월은 광복의 달. 일제강점기 대표적 수탈 현장 군산(群山)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흔적을 찾아서' 광복절 특집 현장취재차 군산 방문 스케줄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 필자의 고향은 군산.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북국민학교를 거쳐 군산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곤 서울로 유학, 고향을 떠났다. 그렇지만 5대째 예수를 믿는 집안의 장손(長孫)인지라, 군산지곡교회는 물론 가정의 대소사(大小事)로 고향을 찾게 된다. 내 어찌 고향을 잊을 손가. 군산이 어떤 곳인데! 산자수명(山紫水明) 기름진 옥토(沃土) 나의 영원한 고향산천아니리오!

-(전략)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이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탁류' 첫머리.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채봉과 정 주사네 가정사가 쌀의 집산지 군산을 무대로 미두장(米豆場) 주변에서 벌어지는 풍자소설이다. 군산문화원 이진원 원장의 증언을 경청한다.

-채만식의 '탁류'와 조정래의 '아리랑'이 묘사하듯, 군산은 역시 쌀을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군복의 원료로 목화를 위해 목포를,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군량미로 가져가기 위해 군산을 병참기지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이리와 연결된 철도 군산선(群山線), 전주를 연결한 신작로 전군가도(全群街道). 일본 오사카로 쌀을 실어내기 위해 3000톤급 배를 댈 수 있는 뜬다리 부잔교(浮棧橋)를 설치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효과적으로 쌀을 수탈해서 감쪽같이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결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투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어떤 나란데!

군산의 근대도시로서의 확장은 이 땅 민초들의 고통과 궤(軌)를 함께했던 것이다. 쌀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앗아갔던 일제는 기름진 쌀 대신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깨묵이나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배급, 굶주림을 달래야 했다. 필자 역시 어린시절 겪어야 했던 슬픔이었다. 배고픔이 가장 큰 설움이라 하지 않던가. 수탈이 극도로 심했던 군산-옥구여서 그랬을까. 이 땅의 거민들은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특출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서울서 일어났고, 3월 5일 전국 최초로 군산에서 '3.5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27년, 전국 10만여 건 농민항쟁 중 최대 규모라 기록된 '옥구농민항쟁운동(沃溝農民抗爭運動)' 역시 이 땅의 민초들 속에서 요원의 들불처럼 타올랐던 것이었다.



#전킨기념사업회(Junkin Memorial Works Committee)

-고 목사님도 아시는 대로, 군산이야말로 미국남장로교 전라도 선교의 교두보요 전진기지 아니겠습니까. 복음으로 어두운 이 땅을 밝혀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낸 영광스럽고도 찬란한 선교역사 현장입니다. 그럼에도 그 동안 군산이 일제강점기 수탈에 얽힌 근대 문화유산 관광명소로만 부각된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하여 2017년 '전킨기념사업회'를 발족, 찬란한 역사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 목사님의 지도편달을 받고자 우리 추진위원들이 방문키로 결의를 했던 것인데, 이렇게 고 목사님께서 친히 왕림해 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충성!"

군복무시 예수 믿고 꿈 속에서도 '충성!'을 외쳐댄다는 서종표 목사. 전남 벌교가 고향이라 했다.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곳 아니던가.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그에게 전킨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맞춤이요, 육탄용사(肉彈勇士) 추진위원들- 김대우 장로(지경교회/이사), 배형원 안수집사(군산시의원), 백일성 집사(군산시청), 박정흠 교수(군산대학)! 척척 죽이 맞는다. 2년만에 엄청난 일들을 추진했다.

-(2017.8.2)전킨기념사업회 발족/ (2017.11.25)군산 첫 도착지-선교지 기념비 제막/ (2018.1.4)제1회 전킨 선교사 추모예배/ (2018.5.25)전킨 선교사 기념사업회 사업자 등록/ (2018.11.14)이야기 전킨 선교사(전병호) 출판/ (2019.1.14)자료 수집차 미국 방문(서종표)/ (2019.2.28)나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 출판/ (2019.4.16)전킨 기념사업회 법인 등록/ (2019.5.17)전킨 기념사업회 설립 감사예배-세미나-전킨 사진전

경과보고 청취 후 즉시 우리는 현장을 찾았다. 1895년 3월 전킨-드루 선교사 '군산 첫 도착지'와 초가집 두 채를 매입, 복음을 전하고 진료했던 '군산 첫 선교지' 기념비를 차례로 참배했다. 그리곤 그 동안 잊혀졌던 군산지곡교회(양성진 목사)를 방문, 전킨과 불 선교사(Rev. W. F. Bull)와의 협력사역 행적을 청취했다. 전킨-불, 전킨-드루의 연합은 협력선교의 이상적 모델로서, 한국교회 해외선교 자성(自省)과 학습(學習)의 전범(典範)이 돼야 할 것이며, 이는 성서의 가르침 아니겠는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전킨 선교사 묘지석(왼쪽부터 서종표목사, 필자, 전병호 목사)

#전군가도(全群街道) vs 아피아가도(ViaAppia Antica)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지도를 펼쳐보시라! 필자는 전병호 목사, 서종표 목사와 함께 전킨 선교사의 발자취를 좇아 전주로 직행했다. 군산-전주를 잇는 전군가도(全群街道)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닦아놓은 신작로(新作路). 우리 백성들을 강제 동원, 땀과 눈물과 피흘린 흔적이다. 바로 그 흔적 위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전킨 선교사는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었던 그 신작로를 따라서 하나, 둘,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통사동교회(개정 통사리), 만자산교회(대야 지경리), 남차문교회(익산 남전리), 그리고 송지동교회(김제 공덕면)! 그 교회들이야말로 전킨을 비롯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갯땅쇠 민초들의 땀과 눈물과 기도로 올려진 금자탑(金字塔)이요, 위대하고도 영광스런 '예수의 흔적(Stigma)' 아니겠는가!

그대는 로마의 아피아가도(Via Appia Antica)를 아는가? 군대, 법, 도로-이 세가지는 로마의 상징이요, 세계 정복의 도구들! 이태리 반도는 물론 유럽 전역 그리고 영국에까지 그 도로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아피아가도를 통해 소아시아로부터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렀으며, 당시 땅끝이라 여겨졌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복용(征服用) 도로를 선교용(宣敎用) 도로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렇다! 전킨 선교사, 그는 일제의 전라도 쌀 수탈용(收奪用) 전군가도(全群街道)를 위대한 복음전파(福音傳播) 선교용으로 선용(善用)했던 것이었다.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와 전킨의 군산선교

신학교 컬리큘럼에 '한국 교회사'는 필수과목이다. 그렇지만 미국북장로교 중심으로 돼 있어 남장로교 한국선교에 관해선 거의 무관심 상태. 2006년 1월 필자는 임화식 목사(당시 순천중앙교회 시무), 김수웅 원로장로(순천동부교회)와 협력, '등대선교회'(OperationLighthouse)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남장로교 전라도 선교를 인지할 수 있었다. 필자의 호신대학보(당시 편집장 전원동) 기고문이다.

-김진영 교수님,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1892년, 북장로교보다 8년 늦었습니다. 그들은 예양협정을 체결(1893), 선교지 분할에 합의합니다. 당시 폐허처럼 버려졌던 땅이 전라도였습니다. 흉년과 풍토병, 동학농민운동으로 선교사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이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 차지가 됐습니다. 그들은 전주(1893)를 시작으로 군산(1895), 목포(1898), 광주(1904), 순천(1906)으로 지경을 넓혔습니다. 바로 그 전라도 땅이 '복음못자리' 되어 한국 복음화율 25%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고무송, 전라도러브콘서트, 드림북, p.27)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150~225AD)은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남장로교 전라도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무덤을 남겼다. 전주예수병원 뒷동산, 광주 호신대학 앞동산, 군산 궁말동산, 순천 매산 등… 필자가 6.25때 철모르고 불러댔던 군가는 그들의 주제가였으리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세 아들을 한국땅에 묻은 전킨 선교사 부부

전킨은 1893년 4월 23일, 큰 아들 조지(George Garnett)를 낳았는데, 1894년 11월 30일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1899년 1월 8일, 넷째 아들 시드니(Sidney Morland)를 두었는데, 같은해 3월 17일 두 달만에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1903년 4월 3일, 다섯째 아들 프란시스(Francis Wood)를 낳았는데, 역시 풍토병으로 생후 6주만에 잃게 된다. 전킨은 모두 8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세 아들이 한국의 풍토병으로 죽어나가 모두 모두 한국땅에 묻힌 것이다. 오호(嗚呼) 애재(哀哉)라!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그대, 참척(慘慽)을 아는가? 부모 앞선 자식의 죽음을 이르는 말. 그런 자식은 산(山)에 묻은 것 아니요, 부모 가슴에 묻은 것이라 했다. 전킨의 둘째 아들 레이번(Rev.E.Leyburn)의 회고록을 본다.

-궁말의 기억 중 가장 슬펐던 것은 또 한 명의 남동생이 죽은 일이었다. 남동생의 이름은 프란시스(Francis) 였다. 형 조지(George)와 시드니(Sidney)에 이어 프란시스까지 세 명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곁으로 떠났다. 프란시스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생후 6주가 됐을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윌리와 나 그리고 몇 명의 조선인 신도들이 언덕 위에 있는 프란시스의 무덤자리를 향해 올라갔다. 예배는 아버지가 직접 집도하셨다. (중략)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든 작고 하얀 관 위에 흙이 덮일 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레이번, 나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 누림과 이룸, pp.123~124)



#도전과 응전(Challenge &Response)

역사학자 토인비(ArnoldJ.Toynbee/1889~1975)는 인류문명 발달을 도전(挑戰)에 대한 응전(應戰)으로 설파했다. 전킨의 군산 선교엔 엄청난 도전이 있었다. 가장 큰 도전은 일본의 압박. 1899년 5월 1일, 군산항 개항과 함께 주민들은 변두리로 밀려났고, 일본인들이 밀려들었다. 선교본부는 수덕산 자락에서 궁말로 옮겨야 했다. 지금 구암동이다. 전킨은 드루와 협력, 작은 범선을 선교선으로 활용했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을 오르내리며 부여, 서천, 한산, 보령, 남포, 강경 등 충청도 일대와 서해바다 고군산 일대를 선교영역으로 확장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전킨은 병약했다. 요양차 미국에서 안식년을 가졌으며, 선교본부는 그를 전주로 이전, 20리 밖으로 나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족령(禁足令)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짧은 체류기간(1904~1908) 괄목할 만한 사역들을 펼쳐 놓았다. 협력사역(Co-Work)을 통해 전킨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완했던 것. 협력선교는 군산선교에서 두드러졌다. 드루 선교사에 이어 1899년 불 선교사(Rev. W. F. Bull/夫偉廉)가 합류, 천군만마를 얻은 전킨 부부는 어린이들을 모아 집에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 훗날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영명학교(제일중고등학교), 멜본딘여학교(영광여자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됐다. 특별히 영명학교는 독립운동의 온상으로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을 선도했다. 당시 영명학교 특별과 재학중이던 전세종(군산지곡교회)은 독립만세를 주도, 모진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훗날 그는 고향 교회의 시무장로로서 목회자 역할을 감당했으며, 깊은 울림의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내 몸에서 일제의 고문 흔적을 볼 수 있으리라. 용서는 하되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전세종 장로, 그의 몸에서 필자가 직접 확인한 '흔적(Stigma)'은 내 삶의 지표가 되어 한국 개신교 최초 순교자 토마스 목사를 연구, 선교신학논문(PhD)으로 완성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됐다. 내 어찌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를 찬양치 않을 수 있으며, 세 아들을 군산땅에 묻은 전킨(Junkin/全偉廉) 선교사와 내 고향 군산지곡교회 개척을 비롯 40년 동안 황소(Bull)처럼 군산선교에 매진한 불(Bull/夫偉廉) 선교사의 헌신에 감사치 않을 수 있으리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Soli Deo Gloria!)



#에필로그(Epilogue): 전킨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

1907년 성탄절, 전킨(全偉廉)은 폐렴에 걸렸고, 1908년 1월 2일 별세, 궁말동산에 묻히게 됐다. 향년 43세. 유족으로는 미망인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선교사와 3남 1녀. 전킨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종표 목사는 지난 1월 14일부터 열흘 동안 유족 위로와 전킨기념관 건립 자료 수집차 미국을 방문, 전킨의 유복자(遺腹子) 알프레드(Alfred C. Junkin)의 아들 프레스톤(Preston D. Junkin, 64세) 부부와 여러 관계자들을 찾아 인사를 나누게 됐다. 필자는 서 목사의 귀국보고에 삼가 옷깃을 여미게된다.

-감사와 송구스런 마음으로 유족들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생전에 할머니(전킨선교사 미망인)의 말씀은, 전킨 선교사가 입버릇처럼 "내가 죽거들랑 군산에 묻어주오!" 그러셨답니다. 그런데 지금 전킨 선교사는 세 아드님과 함께 전주예수병원 뒷동산에 묻혀 계십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사실은 그 무덤들은 몽땅 '빈무덤'입니다. 본래 군산에 있던 묘지를 우리가 돌보지 못한 배은망덕(背恩忘德)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삼가 전킨기념사업회에 맡겨진 큰 사명 하나님 앞에 서원하게 됩니다. 아멘!

고무송 목사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전 본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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