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 역사의 주인공인가?
작성 : 2019년 07월 03일(수) 14:34 가+가-
배민수와 삼애운동을 기억하자



우봉 배민수 목사는 구한말 청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배창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의병장 배창근이 일본 경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14살 소년 배민수는 홀로 상경하여 형무소에서 교수형 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엎고 지금의 연세대학교 뒷산 안산 골짜기에 봉분도 만들지 못하고 묻었다. 소년 배민수와 연세대학교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배민수는 평양 숭실학교 유학중에 비밀결사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 조선지부를 조직하고, 서기와 통신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체포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한다. 이 때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도 10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1919년 출옥 후 함경북도 성진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2차 감옥생활을 한다.

배민수는 2차 감옥생활 중 고당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받고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삼애운동을 조국 독립운동으로 마지막까지 제창하고 실행한다. 배민수는 성진에서 독립운동 중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 최순옥을 만나 결혼하고, 부부는 평생을 독립운동과 삼애운동의 동지로 함께 한다.

필자는 지면을 통해 최순옥 여사와 연세대 간에 이루어진 삼애학원 기증에 대한 건을 말하고 싶다. 최순옥 여사는 소련에서 자랐고, 교육받은 신세대 여성이었다. 1919년 성진에서 배민수 목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농촌운동을 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함께 일한 동반자였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열렬한 동지이고, 삼애운동의 후원자였으며 계승자였다. 뿐만 아니라 최 여사는 해방 직후 미군 주둔군 사령관의 소련어 통역관으로 일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 여성지도자였다. 독립운동가, 농촌운동가, 그리고 건국시기에 헌신한 여성 지도자인 것이다.

최순옥 여사는 배민수 목사와 결혼 후 40년간 우봉 배민수로부터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의병장 배창근의 순국과 안산에 봉분없이 묻힌 시아버지의 눈물겨운 순국 사연이다. 부군으로부터 미국 망명길에서, 농촌운동 중에서, 태평양전쟁 중에, 그리고 귀국 후 삼애운동을 실천하면서 연세대 뒷산 안산에 누워 있는 의병장 배창근의 생생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1968년 배민수 목사가 소천하고 삼애학원과 삼애농장을 홀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순옥 여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때에 이 기관을 기증해 줄 것을 청원한 3개 기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숭실대학교와 한경직 목사다. 한 목사는 배 목사와 숭실학교 동문이고, 서울수복 숭실대학교 창립 시에 배 목사는 재단이사장, 한 목사는 학장이었다.

둘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였다. 초대 농촌부 총무로 삼애운동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관이다. 당시 삼애학원 이사 곽재기 목사가 농촌부 총무 후임이었다.

셋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다.

위 세 기관의 간곡한 청원에 대해 최순옥 여사는 뜻밖의 결정을 한다. 당시 어떤 제안이나 문의조차 없었던 연세대학교 농업개발원에 삼애학원과 삼애농장을 기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연세대 농업개발원이 삼애정신과 삼애교육 목적을 계승할 최적의 기독교교육 기관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는 의병장 배창근 의사가 연세대 뒷산에 봉분없이 누워있는 가족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경직 목사의 숭실대학교 기증 요청은 최순옥 여사에게 가장 힘든 거절이었다. 평양 숭실학교 동창이고, 목사로서 막역한 친구이고, 서울에서 숭실대학을 수복할 때 각각 책임을 맡아서 세운 학교였기 때문이다.

연세대 농업개발원은 어떤 인연이나 기증 요청 등이 없었음에도 농업개발원만이 배민수의 삼애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기독교 농촌 기관임을 확신했기에 내린 결정이다.

1976년 우봉 배민수 목사가 필생의 사업으로 여긴 삼애정신과 함께 6만평의 일산 농장이 연세대 농업개발원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는 무성의했다. 아니 철저히 기증 조건을 무시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외면했다.

기증 후 17년간 농업개발원과 삼애정신이 흔적도 없이 잊혀져 갈 때에, 참다못한 기증 당시 이사들, 관계자들, 유족 대표들, 교계 대표들, 그리고 삼애 졸업생들이 수차례 연세대학교 측에 항의와 진정 그리고 청원을 했지만 무산되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 분들이 연명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 삼애학원에 대한 위임장과 청원서를 1993년에 제출하였다.

상세한 관련 문서는 필자가 쓴 '누가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알렌, 에비슨 그리고 윤동주로 이룩된 한국 근대 역사와 함께 오늘 배민수와 삼애정신이 연세대학교에 이어지고 있다. 이 삼애정신을 잇고 계승, 발전시켜서 연세대와 우리나라가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일산 삼애농장(6만평)에 40~50층짜리 고층 아파트를 지은들 100~200년 후에 연세 역사와 한국 역사에 무엇으로 기록될까.

필자는 삼애정신과 함께 연세대학교가 다가올 통일한국 시대를 위해서 북한 농촌, 아세아 농촌 지역에 삼애운동과 삼애정신을 계승 발전 교육할 수 있는 기관으로 존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세대와 배민수 목사가 지난 130년 동안 이 국가의 독립, 교육, 문화, 의료의 역사를 이룩하여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역사를 선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세대학교는 배민수 목사와 삼애정신을 이어가게 해 주어야 한다. 기증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박노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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