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조천만세동산에서 시작한 3.1 만세 운동
제주지역
작성 : 2019년 07월 03일(수) 08:08 가+가-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진 삼일독립운동기념탑.

【제주=최샘찬 기자】 기미년 3.1운동, '대한독립 만세' 외침은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제주에서도 울려 퍼졌다. 제주의 3.1운동도 기독교인과 교회가 중심이 됐으며 3월 21~24일 나흘간 미밋동산(현 조천만세동산)을 기점으로 교회 청년들과 마을주민 등 연인원 8000여 명이 참여했다. 3.1운동 직후 5월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제주지역 교회들이 적극 참여해 4450여 명이 금 1만원을 모아 송금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제주까지 어떻게 전파됐을까. 제주 조천리 출신으로 서울 휘문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장환이 독립선언문 낭독을 지켜보고 직접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6일 고향 조천으로 돌아왔다. 숙부 김시범 당숙 김시은 등에게 서울의 소식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제주의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조천교회 교인, 마을 주민 등과 협력해 구체적인 인원 동원 계획을 세웠다.

전국 각지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기미독립만세운동은 그렇게 조천만세동산까지 내려왔다.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일본에게 나라를 돌려달라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조천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함덕리와 신흥리, 서쪽으로 신촌리까지 퍼져 나갔다.

제주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첫째날 3월 21일, 마을 청년과 학생 등 주민은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였다. 오전 10시경 15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했고 그 수는 곧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3시경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 모두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조천리 일대는 함성으로 가득찼다. 오후 늦게 순사 30여 명이 도착해 김시범 김시은 등 주도자 9명을 연행했다. 2차 시위는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화창하며 구속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조천만세동산의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김연배 수형기록표
이틀간 만세운동을 주도한 14인 중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체포되며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22일 주일이라 시위에 불참했던 김연배와 교회 청년들이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시위를 주도했다. 김연배가 앞장서 만세시위를 이끌며 일제에게 구속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100명의 군중으로 시작한 만세운동은 셋째날 800여 명, 24일 4차 시위엔 각 지역 청년들이 합세해 15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조천교회 청년 김연배의 주도로 교회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 소식이 전파됐기 때문이다.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주역으로 평가받는 김연배는 당시 24세로, 조천교회의 집사였다.

만세운동으로 잡힌 이들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김시범 김시은 김연배 등 주동자 5명에겐 1년을 선고받는 등 총 23명이 집행유예, 징역 6월~1년형 등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해 김연배는 8개월 형을 받았지만, 다른 주모자들이 '치안방해죄'로 구속된 반면 김연배는 '안녕질서 방해죄'로 구속돼 조사를 받았다.

조천만세동산에서 4일 연속으로 이어진 항일운동엔 연인원 8000여 명이 참가했다. 서당의 학동 주민 소상인 부녀자 아동들도 동참했다. 조선독립만세의 참여문제를 김연배가 당시 조천지역 담당교역자인 임정찬 목사와도 상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의 정교분리 원칙으로 목사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교회의 참여는 군자금모집사건으로 이어졌다.

제주의 3.1만세운동이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11일 애국지사들은 일제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지원금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독립희생회가 조직돼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제주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군자금 모금을 요청했다. 이때 조봉호가 솔선해 제주도 전체에 걸쳐 모금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에 제주 목회자들이 협력했고 교회가 중심이 돼 범 도민적 참여가 이뤄졌다.

50일 동안 4450여 명이 1만원을 모아 군자금을 무사히 상해로 전달했으나 파견된 회원들이 검거당하고 군자금 송금 영수증도 발각됐다. 조봉호 등 관계자 60여 명이 체포됐고 조봉호는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자신이 주모자라고 자처했다. 그 결과 성내교회 집사였던 최정식은 1년 6개월, 조봉호는 1년이 선고됐으며 나머지 인사들은 선고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윤식명 목사, 임정찬 목사도 실형은 면했다. 결국 조봉호는 대구 형무소에서 1920년 4월 38세 나이로 순국한다.

한편 기자는 지난 6월 28일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 김인주 목사(봉성교회)의 도움으로 100년 전 제주 3.1운동의 현장을 찾아가 제주 항일독립운동의 큰 역할을 한 김연배와 조봉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비, 김연배
제주에서 만세운동이 시작한 조천만세동산에는 제주항일기념관과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등이 세워져 있다. 독립유공자비 중 김연배 집사의 묘비도 있다. 24세의 나이로 제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연배 집사는 1919년 말 만기 출감 후 고문 휴유증으로 1923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것은 1993년 광복절로 70년이 걸렸다.

김연배 집사의 유언대로 비석 앞부분에 "이신종명 필득영생(以信終命 必得永生)"이라 적혀있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마침내 틀림없는 영원한 삶, 영생을 얻었도다.'

제주항일기념관이 있는 만세동산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만세로'라는 비석과 함께 조천교회가 나온다 . 100년 전 신앙의 선배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내려온 길이다. 이 주변엔 김연배 생가도 보존돼 있어 지역주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었다.

또한 군자금 모금을 주도적으로 이끈 독립투사 조봉호의 흔적도 모충사 제주 성내교회 금성교회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모충사에 1977년 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가 세워졌다.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으나 유해도 유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아 묘도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건립됐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기념비 약력은 "그가 제주 성내교회 이기풍 목사와 더불어 조사로 시무했으며 선교활동을 위해 진력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주성내교회
성내교회에는 모충사에서 본 선교기념비문이 복제돼 있었고, 제주노회의 이름으로 건립된 선교 공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또한 금성교회 내부 동판에서도 조봉호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금성교회를 봉헌하면서' 제목으로 1996년 제작된 동판은 "금성교회는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조봉호 등이 예수를 믿어 처소를 이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초대교인인 조봉호는 자금모금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1920년 4월 28일 옥중 순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판에는 조봉호의 손자인 조태신 집사도 언급하고 있다. 금성교회에 당일 비치돼 있던 주보에서 조봉호의 증손녀 조은정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중인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금성교회 옛 예배당에서도 조봉호 등이 기도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19년 기미년 제주의 항일독립운동에 몸 바친 그들의 기록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모충사의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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