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한인교회의 시작과 재독한인교회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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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2019년 06월 26일(수) 00:00 가+가-
독일에 있는 한인교회 역사는 파독광부와 간호사분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1963년부터 1977년 사이에 1만 명의 간호사들과 8천 명의 광부들이 독일 땅에 왔다.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고된 직종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계약직이었다. 힘들게 정착한 곳을 다시금 떠나야 했기에 대대적인 서명운동과 집회 등을 통해 마침내 법적으로 장기체류가 허가되었다. 그분들이 독일한인사회의 토대가 되었고, 한인교회를 세워간 주인공들이었다.

필자가 사역하는 곳은 독일 남서부이다. 탄광과 루르공업지대가 자리한 중북부 지역과는 달리 이곳은 광부들이 없었기에 대부분 한인간호사분들이 독일남편을 만나 정착하였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인해 한국소식을 매일 접하며 고국의 식구들과도 편하게 소통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전화 한 통화를 위해서도 우체국까지 가야했던 시절이었기에 고국에 대한 향수와 이방 땅에서 겪는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실제로 정착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도 계셨다. 가장 친밀해야 할 부부관계도 문화와 언어와 정서의 간극을 메우지 못해 많은 부분을 서로 포기하고 살아가야 했다. 권사님 한 분의 말씀을 잊을 수 없다. "목사님, 평생을 살아도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우리 가슴 속에 뻥 뚫려 있어요."

재독한인교회협의회 창립40주년 기념예배 참석한 한인목회자들과 독일교회관계자들.
초창기 이 분들은 독일교회에 나갔지만, 언어와 영적인 분위기가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한인들끼리 독일교회를 빌려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고, 독일개신교회(EKD)에 정식으로 한인목회자를 통해 영적인 돌봄을 받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고맙게도 독일개신교회는 한국교회협의회(KNCC)에 정식으로 한인목회자를 파송할 것을 요청하였고 쌍방 간에 협정을 맺어 한국에서 목회자가 독일로 왔다. 파송된 목회자들은 독일교회의 법적인 테두리 속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비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독일교회가 한국인노동자들을 위해 한인목회자를 세워준 것이었다. 이 때 세워진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독교 재독한인교회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독일 전역에 8개 교회들이 회원으로 협력하고 있다.

재독한인교회협의회는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4월 27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던 프랑크푸르트 크리스투스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감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회원교회들은 독일주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전폭적이었던 목회자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협의회 교회들의 목회자는 예장 통합과 기장과 감리교 출신들이다. 1970~80년대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독일 땅에서 목소리를 내었고, 오늘까지도 지속적으로 조선그리스도연맹과 관련을 맺고 북한을 돕고 있다. 독일성서공회와 한국성서공회의 협조로 독일 2세들과 한인교인들을 위해 한독대조성경을 발간하여 배포하고 있다. 복지위원회에서는 매년 종교개혁지탐방이나 성지순례를 진행하고 있고, 여신도연합회에서는 연합수련회를 개최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며 교제하고 있다. 목회자들의 모임인 신학위원회는 협의회의 역할을 심도있게 논의하며, 독일 한인교회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순번으로 회장을 맡고 있는데, 올해 필자가 2번째 회장임기를 보내고 있다. 협의회의 고민은 독일한인사회의 고민과 맥락을 같이 한다. 4만 명인 한인사회가 고령화되고 있다. 광부와 간호사로 오신 1세대 분들이 공직과 봉사직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분들은 한국을 대표한다는 문화사절단의 의식도 강했고, 한인교회를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다. 2세들과 젊은 세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앞선 세대분들의 헌신도 잘 이어받기를 소망한다. 정말 그래줬으면 좋겠다.

김태준 목사/독일남부지방한인교회·총회파송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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