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아카이브로 본 6.25전쟁과 참회
작성 : 2019년 06월 18일(화) 14:06 가+가-
전란 후 열린 첫 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과오 돌이키고 금식 선포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성명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를 다룬 본보 기사. 기사 중 윗쪽 사진은 발언하는 권연호 목사, 아랫쪽 사진은 총대들의 참회 모습.
"우리가 저지른 무서운 죄로 인해 이 땅에 전란이 온 줄 믿습니다"

올해로 한국전쟁 69주년을 맞는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뤄졌다. 3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친 한국교회는 "죄로 인해 이 땅에 전란이 왔고 이 또한 하나님의 책망"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한국교회는 정전선언 이듬해인 1954년 4월 개최된 총회에서 회개와 참회의 결과로 신사참배 결의를 전격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본보에 따르면, 휴전 이후 첫 총회로 열린 1954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 둘째날 저녁, 회무 시작과 함께 36대 총회장을 지낸 권연호 목사가 발언권을 얻어 총대들에게 제안한다.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앞장선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해방 후 남부총회에서 회개하고 각 노회, 교회, 혹은 개인이 참회했다 하여도 성문화된 기록은 없습니다. 더욱이 이번 총회는 남북 합석 총회니만큼 반드시 이것을 청산하고 지나가야 겠습니다.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온 교회가 자복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해방 후 한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꺼낼 필요가 없다', '오늘은 늦었으니 뒤로 미루자' 등 반론이 나왔으나, 해방 후 처음 한자리에 모인 남북교회 총대들은 '지금 우리에겐 회개가 필요하다'는 외침에 공감했다. 총회장은 가부를 물어 신사참배결의 취소를 가결하고 3인 위원을 통해 절차를 준비케 했다. 다음날 새벽으로 예정됐던 성찬식은 무기한 연기됐다.

명신홍 목사의 지명으로 권연호 목사가 기도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이 땅에 전란이 왔고, 이 민족 내 백성들이 수없는 피와 살을 쏟고 찢었나이다. 교회가 갈라지고 38선이 가로막히게 된 것이 이 죄과인줄 확신하옵고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 것이 마땅한 줄 아나이다. 주여 총회가 모일 때마다 물고 찢고 싸움하고 교직자끼리 서로 반목한 것이 이 죄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금번 총회에 은혜를 주시고 이 석상에 임재하셔서 불충불의한 저희들의 마음을 한번 감화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셔서, 오는 성례에 깨끗한 마음으로 참례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본보 1954년 5월 3일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 장내에선 눈물을 씻는 소리,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살얼음 찬바람 헤쳐가며 평양 신사 조선신궁 돌계단을 오르내렸던 때가 어제 일만 같고 귀신 목탁처럼 수천 번 두드렸던 그날의 손바닥이 아직 눈 앞에 그대로 붙어있는 이 저녁! 어찌 가슴만이 쓰라리며 눈물만 흘려야 하리오. 피와 뼈를 쏟고 찢더라도 이제는 다시 실족치 않겠다는 철석같은 결심을 강력히 가다듬는 간절한 이 한밤이 벌써 그리고 마땅히 있어졌어야 할 것이었다.'

총회 셋째날은 주일이었다. 이어진 넷째날 오전 성명이 발표된다.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긴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범한 것임을 자각하고 남부대회가 신사참배 회개를 결의하여 시행하였으되, 남북통일 총회가 아니었던 고로 금번 남북통일 된 본 총회는 이를 취소하고 전국 교우 앞에 성명한다. 1954년 4월 2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원 일동.'

성명을 준비한 명신홍, 이원영, 권연호 목사는 6월 첫 주일을 통회주일로 정해 전국교회가 하루 금식하며 속죄를 위해 기도하고, 신사참배로 순교한 성도의 유가족을 위해 연보하고 위문할 것 등도 제안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보통 9월에 열렸지만 해방 이후 4월에 열리고 있었다. 따라서 1954년 4월 23일 안동중앙교회에서 열린 총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첫 총회였다. 남하한 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하면서 이 총회는 '남북 총회', '통일 총회'로 불렸으며, 지역명을 따라 '안동 총회'라는 명칭도 얻었다.

본보 1954년 5월 10일자에 실린 제39회 총회 폐회기사엔 이런 제목이 붙었다. '한국교회 부흥의 표징 발로(發露), 통회 자복으로 시종(始終), 금식일을 희락(喜樂,)일로 축복, 각 노회서 신사참배 거부자 제명 해제'. 기사는 '이번 총회는 신사참배결의를 16년만에 취소 성명하는 동시에 제사장적 지위에서 통회 자복함으로써 신사참배 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평가했다.

데이터 입력 작업이 거의 완료된 본보 디지털 아카이브에 따르면 1938년 신사참배 결의 당시 교세는 25만 명이었지만, 1954년엔 62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죄악의 장벽을 무너뜨린(당시 본보 기사 제목에서 인용)' 제39회 총회를 계기로 총회는 교육기관 설립과 다음세대 육성에 더욱 매진하게 됐으며, 국내적으로는 교인 배가운동, 국외에선 중단된 선교 후원 복구가 활발히 이뤄지게 됐다.

제39회 총회는 목사 85명, 장로 78명, 선교사 13명, 총 176명으로 개회했으며, 예정일보다 하루 연장해 1954년 4월 28일 오후 6시 20분에 폐막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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