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11>마태 18:23~35
작성 : 2019년 06월 21일(금) 00:00 가+가-
교회공동체의 규율에 관한 가르침(discourse)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의 주된 가르침은 작은 자들과 미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공동체 회원의 제명과 추방에 관한 규범적 가르침(마 18:15~20)을 제시한다. 마태는 공동체로부터 어떤 회원을 제명 또는 추방시키는 권위(18:15~20)가 남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고서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18:21~35)를 통해 다시금 '자비와 사랑'의 해석학적 원칙을 강조한다. 비유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예수는 여기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말씀과 함께 마음으로 진정 형제를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그러므로 이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의 결론으로서 18장 전체의 해석학적 열쇠를 제공한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의 비유를 알레고리나 도덕적 본보기적 이야기로 제시하였다. 비유의 도입부(18:23, '천국은…같다')와 결론적 말씀(18:35)은 이 비유가 알레고리라는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이 비유의 알레고리로의 변이는 첫째, 마지막의 주인의 보복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이 비유는 심판과 자비와 용서의 이야기로 해석된다. 둘째, 비유의 적용문은 비유의 논거의 방향을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행동을 결정짓는 조건으로 만든다. 이러한 결론은 이 비유를 본보기적 행동을 위한 경고의 말씀으로 만들고 있다. 셋째, 이 비유는 마태의 다른 비유들, 큰 잔치 비유(마 22:1~14), 열 처녀 비유(마 15:1~13)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자가 올 때 심판의 날에 판단 받게 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있는 공동체라는 마태적 개념을 특징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유의 본래적 배경은 로마 제국에 종속된 분봉왕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로마는 헤롯 가문을 '대리자'로 내세우면서 헬레니즘의 세금 체제로 돌아갔다. 헤롯 가문은 이 땅의 지배권을 얻기 위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위로는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아래로는 귀족들에게 땅을 분할하여 팔았다. 당시 갈릴리의 땅은 대부분이 대토지로 소작농들이 경작하였다. 세금의 도급 행위는 다시 2차로 도급되어 중간관리인에게 넘겨졌고, 중간관리인들은 마을이나 단체 등에 대하여 1년 조세 총액에 대한 소작료 임차를 받아 대납하고 독점적인 징세 권한을 가졌다. 이들은 소작농들이 내야 할 지대와 임차료 총금액에 대한 재량권을 가졌다. 따라서 착취의 관행은 일상화되었다. 이들이 바로 '세리와 같은 자'이다(막 2:16; 눅 19:7). 비유에서 천문학적인 수를 가리키는 '일만 달란트'라는 채무의 정도 외에는 그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달 팔아서 채무를 변제하라는 명령과 하지만 빚을 탕감해 주는 일과 그 이후 그 결정을 취소하여 다시 그 종을 치리하는 내용은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어울린다.

백 데나리온 역시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로마 군인의 6개월 치 월급이요, 일일노동자의 약 1년 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하지만 일만 달란트는 백 데나리온에 비하면 백만 배에 해당되는 금액이므로 일만 달란트의 금액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원래적 금액은 일백 달란트 혹은 일만 데나리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비유에서 갚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빚을 상징하기 위해 그 금액이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에게 그 채권을 강제로 집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행위임이 분명하다.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종은 주인의 예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주인의 용서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명예와 수치라는 가치 체제에서 종은 주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다.

비유는 후견인과 예속 관료라는 당시의 체제에 잠재해 있는 구조적인 악을 지적하면서 '제국이라는 모델에 따라 세상을 조직하려는 모든 노력에' 근본적인 도전을 던진다. 비유는 권력의 지도층들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밥상공동체를 나누면서 그들을 공동체 속으로 받아들이는 예수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권력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자들, 곧 사회적 강자들이다. 통상 주인(왕)은 냉혹하다. 비유의 엉뚱성은 전혀 예기치 않은 장면에 있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라는 '하늘만큼 땅만큼'에 해당되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일만 달란트라는 막대한 빚의 탕감은 희년의 희망이 성취된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비유는 분명하게도 메시아적 함의를 가진다.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종은 주인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신성한 것을 범한다. 아니, 종은 주인의 권위에 대항한다. 종의 할 일은 주인이 한 것처럼 자비를 베풂에 있다. 하지만 종은 다른 동료에게 채무를 변제하라고 요구하고 형벌을 가한다.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3)"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이 마태공동체는 자비의 해석학으로 율법의 역할을 새로이 규정한다. 이로써 공동체가 소종파적 편협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고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나아가 "가서 제자 삼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마 28:19).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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