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 설교를위한성서읽기10 ]
작성 : 2019년 06월 14일(금) 00:00 가+가-
눅 15:11~32
이 비유의 전통적인 제목은 '탕자의 비유'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주인공을 달리 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맏아들을 꾸짖는 비유로 봄으로써 '두 아들에 관한 비유'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아버지(의 관대함)에 관한 비유'로 해석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를 그들 자신의 선택된 신분에 대한 자기 이해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째 아들과 동일시하였고, 유대인들을 첫째 아들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적절치 못하다. 이 비유는 형제지간의 경쟁 이야기의 유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운명은 에서의 운명과 같지 않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미워함을 받지 않았고, 둘째 아들이 야곱의 몫을 받는 것도 아니다. 사실, 첫째 아들은 상속자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졌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야?(31)"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어느 하나의 손을 들어주는 자가 아니라 둘 모두를 받아들인다.

한편, 저명한 비유 학자인 예레미아스는 죄인을 확대 해석한다. "이 비유는 큰 아들과 같은 사람들, 즉 복음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해진 것이다… 그의 청중들은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인가를 결단해야 했던 큰 아들의 입장에 서있다." 예레미아스의 해석은 오히려 누가의 편집적 관점에서의 해석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 비유를 앞의 두 비유와 함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답변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들은 타락과 회개라는 윤리적 모티프로 전용되어 '길 잃은 양', '방황하는 양', '방탕한 아들'은 '죄인'을 상징하는 비유로 이해되었다. 누가 15장의 세 비유는 '기쁨'(15:6~7, 9~10, 23~24, 32)과 '잃음과 찾음'(6, 9, 24, 32)과 '회개'(7, 10, 18)를 그 중심 내용으로 한다. 마태복음에서 그 평행 본문을 찾을 수 있는 잃은 양의 비유(눅 15:3~7; 마 18:10~14)에서도 마태와 누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는 구절이 누가복음에만 있다는 것이다. 잃은 은전을 찾는 비유에서도 잃어버린 은전 자체가 타락했다거나 회개를 한다고 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는 적용문을 가진다. 죄인의 회개 모티프는 누가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눅 5:32, 7:39, 15:7~8).

누가는 이 비유를 회개하는 죄인들에 대한 비유로 이해한 것 같다. 그 이후 해석의 역사에 있어서 이 비유는 더 많이 회개하는 죄인의 본보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첫째, "그는 잃었다가 찾았다"(15:24, 32)는 표현은 윤리적 회개의 표현이 아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가 자신을 망쳤지만 그는 (…에 의해서) 발견되었다(was found)"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죽었다'는 것은 삶의 상실을 의미하고, '살아났다'는 것은 삶의 회복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단순히 윤리적 상실(타락)과 윤리적 회복(회개)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래의 의미를 축소화 내지 왜곡하는 것이다. 둘째, 앞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잃음과 찾음은 이 비유의 본래적 모티프로 판단된다. 셋째, 아버지의 "측은히 여겼다(15:20)"는 표현은 첫째 아들의 '노하다(15:28)'와 더불어 이 비유를 구성하는 중심적 요소이다.

비유는 둘째 아들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 역시 탐욕스러운 아들임을 적시한다. 하지만 비유는 형제 간의 갈등이라는 전통적인 민간전승을 그 주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당시의 잣대로 볼 때, 분명히 이상한 아버지이다. 둘째 아들의 요구(탐욕)에 재산을 분배함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춤'도 동양의 아버지의 위엄을 팽개친 행동이다. 아버지는 또한 첫째 아들의 분노(탐욕)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얘야'라고 부르며 달랜다. 아버지는 도덕성에도 재산에도 권위에도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두 아들에게 있다. "그는 언제라도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내팽개칠 각오가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비유는 아버지의 관대한 행동을 강조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눠 줌에 있어서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측은히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기쁨으로 둘째 아들의 돌아옴을 축하함에 있어서도, 심지어 첫째 아들의 분노와 불평을 훈계함에 있어서도 관대하였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잃음과 찾음', '분노와 관대함', '탐욕과 관대함'의 대비가 보여주듯이 삶을 상실한 자가 삶을 회복함에 있다. 삶의 회복에 있어서 유일한 열쇠는 바로 관대함(자비로움)이다.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를 희생하면서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묵시문학적 그림이나 세상의 선택을 거부한다.

비유는 우리의 모습을 해부한다. 그것은 탐욕과 분노에 관한 이야기이다. 탐욕과 분노는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파국(잃음)으로 이끈다. 하지만 비유는 인간의 문제점을 치유(찾음)하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탐욕과 분노의 대극점에 있는 관대함/자비함이다. 관대함/자비함은 인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치유하는 힘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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