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회 종소리 '기미독립만세' 알리는 신호였다
진주 기미독립만세, 각계각층 참여로 서부경남 지역로 확산 계기
작성 : 2019년 06월 05일(수) 10:02 가+가-

중앙시장 주변에는 상가와 고층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다. 하지만 교회와 시장을 잇는 미로 같은 골목길은 100년 전 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안고 그대로 존재했다.

예장 합동 측 진주교회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3월 1일 종탑을 복원했다
"이날은 3.18일, 진주의 장날이었다. 때아닌 교회 종소리가 영시를 기하여 우렁차게 울리었으니 정의의 종소리며 독립의 우렁찬 소리였다."(한규상의 '나의 조국 나의 교회' 중), "주모자들이 3월 18일 진주장날에 즈음하여 예수교예배당(진주교회)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약 1만 군중이 모여"(고등경찰관적계록)



진주 3.1만세운동은 서울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군중이 집결된 시위로 손꼽힌다. 고종 장례에 참석한 인사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가져와 비밀리에 인쇄해 그 내용으로 '교유문'을 새롭게 작성하고 배포하면서 확산했다. 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전개된 진주 3.1만세운동은 중앙시장, 촉석루 입구, 재판소(법원) 앞, 봉곡동, 칠암동 강변 등 5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다. 그 일은 진주교회 성도들이 주도했고 기생, 거지, 노동 독립단, 장꾼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시민이 한 곳에 모여 '논개'의 얼과 기백을 잇겠다는 각오로 함께했다.



진주 향토사학자 추경화 집사가 진주 기미독립만세 운동이 진행된 재판소(법원) 터를 소개하고 있다.
#진주교회 종소리, '진주 기미독립만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댕~댕~댕" 100년 전인 1919년 3월 18일 정오. 약속대로 진주교회 마당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장엄하고 우렁차게 울렸다. 그날은 진주읍의 가장 큰 장날이었다. 중앙시장에 모인 수만명의 인파가 장을 보던 중 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진주와 진양의 인구 10만명 중 3만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진주교회 종소리였다는 주장에 반박해 시위계획 탄로로 경찰이 교회 종을 압류해 그 대신에 나팔로 신호를 삼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진주 향토사학자 추경화 집사(진주교회)는 기록된 자료와 시대적 상황에 근거해 '교회 종'이 울리며 시위가 시작되었다고 단정 지어 기록했다.

지난 달 말. 진주 향토사학자 추경화 집사와 함께 합동측 진주교회를 찾았다. 100년 전 3월 18일에 울렸던 종은 현재 존재하지 않았지만, 진주교회(교단분열로 합동 측)는 진주 기미독립만세의거 기념종탑을 복원했다. 추경화 집사는 "1919년 3월 18일 장날에 처음 있었던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는 진주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진주 지역 5곳에서 일제히 시작됐으며 당일 일제에 의해 종이 강제 철거됐다"며 "현재 합동 측 진주교회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3월 1일 종탑을 복원했다"고 전했다. 당시 사라졌던 진주교회 종은 추경화 집사에 의해 발견됐고, 현재 천안 예장 고신 측 신학교가 보관 중이다.

진주 기미독립만세의 시발점이었던 진주교회는 '중앙시장'을 지나야 이를 수 있다. 중앙시장 주변에는 상가와 고층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다. 하지만 교회와 시장을 잇는 미로 같은 골목길은 100년 전 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안고 그대로 존재했다. 그 길은 진주 시민, 대한민국 국민, 한국교회 성도들에겐 잊지 못할 민족의 수난과 아픔이 깃든 골목이었다.



#'진주 기미독립만세'는 선교사에게 교육받은 학생, 기생과 장꾼 등 각계각층 참여

본교단 진주교회.
진주기미독립만세 의거의 가장 큰 특징은 각계각층의 많은 인원이 여러 날에 걸쳐 시위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진주교회 교인들로 구성된 '교인독립단'을 비롯해 기생들로 구성된 '기생독립단', '학생독립단', '농민독립단', '시민독립단', '노동독립대', '걸인독립대' 등으로 다양했다. 특히 140여 명의 진주항일투사 중 진주교회 교인이 49명에 달할 정도로 진주 기독교인들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외에도 당시 진주 지역 최초의 선교사였던 커를(Dr. Hugh Currell, 거열후)의 교육을 받은 광림학교 학생들과 배돈병원 의사와 간호사 등도 동참하고 지원하며 진주의 만세시위의 함성은 더욱 뜨거웠다. 또 18일 다음날인 19일 진행된 둘째날 시위에서는 커를 선교사가 세운 광림학교 악대부 출신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도 했다.

추경화 집사는 "시민들의 호응도(관심)를 높이기 위해 당시 악기가 필요했을 것"이라며 "큰북, 작은북, 나팔, 코르렛 등이 동원됐고 악대부는 선두에서 애국가를 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선교사의 신앙관으로 애국애족의 영향을 받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섰던 학생들을 교육하고 기독인재를 양성했던 광림학교와 시원여학교는 해방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 폐교됐고, 결국 재개교하지 못해 역사적 전통을 잇지 못하게 됐다.

진주 기미독립만세를 주도한 인물 중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순사로 재직 중이던 2명의 조선인이었다. 그중 한 순사는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했고, 진주 기미독립만세의 계획이 발각될 수 있다는 내부 정보를 제공하면서 18일 기미독립만세의 성공적 시작을 도왔다.

추경화 집사는 "진주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전개된 진주 3.1운동이 끼친 영향과 교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수많은 민족의 선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재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소중하다"며 "이웃과 민족, 나라를 너무도 사랑하여 흘리신 그들의 피땀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커다란 교훈으로 울림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진주 읍에서만 20여 차례 이상 진행된 기미독립만세, 서부경남 전 지역으로 확산

일본 경찰의 경계가 강화됐지만, 진주의 기미독립만세 운동은 오히려 뜨거웠다. 일본 순사들은 엄청난 수의 군중을 제압하지 못하자 소방대를 동원해 시위 현장에서 검정색 잉크를 뿌리며 시위 참여자를 구분할 정도였다. 당시 진주 읍내 인구는 2만이었고, 진양 인구는 8만인 점을 감안하면 3만여 명이 동원된 진주 기미독립만세는 과히 폭발적이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진주 시위는 17회로 18일부터 25일까지 참여인원 2만8000에 달하고, 사망 42명, 부상 150명, 투옥 242명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특히 22일 예수교 청년단은 수 천 명의 군중을 거느리고 시위했고, 3월 23일과 24일 시위 후에는 30여 명이 투옥되어 징역에 처했다고 전했다.

진주에서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산청과 하동, 사천, 의령, 합천 등 서부경남 전지역으로 확산됐다. 강달룡 선생은 하동, 남해, 사천 등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진주 일대 농촌지역과 서부경남의 독립만세 운동의 불씨를 전파했다.

추경화 집사는 "진주지역 3.1운동사는 결코 변방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우리 스스로에게 자조하고 훈육하여 선조들의 아름답고 희생적인 삶을 수범삼아 생활한다면 그것이 바로 구국이 되고, 애국 애족으로 발전되어 지역과 이웃을 위한 봉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임성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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