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 여전도회 ]
작성 : 2019년 05월 23일(목) 08:32 가+가-
4. 신앙과 교육ㆍ문화

(1) 문서를 통한 교육: 정기간행물

매월 지교회에서 모이는 여전도회 월례회의 예배와 기도를 통일시키고 여전도회원들의 관심을 같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자료로 월례회 인도 책자가 일찍이 출간된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제 밑에서 출간이 정지된 이후 그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1956년 월례회 인도 책자가 김필례 회장 당시 다시 속간되어 지금까지 지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예배 순서와 설교 말씀, 기도 제목을 넣어 전국의 지교회까지 함께 같은 말씀과 기도로 힘을 합할 수 있다는 점, 손쉽게 인도자가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부록으로 실은 '회의 진행법'도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2) 문서 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단지인 한국기독공보를 군부대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도록 4000부 이상을 1972년 8월부터 전국연합회와 지연합회가 협조하여 보급하고 있다. 그 대금은 한국기독공보사에 전달하기로 결의하여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으며 유일한 기독여성 가정잡지인 '새가정'을 지원해 왔다. 새가정위원회에 위원을 파송하여 일곱 교단이 협력해 오고 있으면서 특별히 군부대에 '새가정'을 보내는 일에 전국의 지연합회들이 협조하고 있다. 매월 '새가정' 1500부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기독교 문서를 군대에 보내어 선교와 영혼의 양식이 되도록 하고 있다.

(3) 연예인교회

여전도회는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연예인교회에 대한 관심과 협조가 대표적 사례 중에 하나이다. 당시 장로회신학대학 재학생이던 하용조 전도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최고 스타급인 연예인들이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이 교회로 발전되어 1978년 120여 명이 연예인교회의 주축이 되었다. 여전도회는 그들의 선교를 위한 공연을 힘껏 보조함으로 뒷받침했다. 1976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첫 공연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연예인교회 건립기금에 성원했다. 총회나 제1회 선교대회시 연예인교회 연예인들의 간증과 찬양은 당시 참석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Ⅳ. 1980년대 이후: "21세기를 준비하는 시대"

1. 신앙과 정치

(1) 통일에 대한 관심

1987년 9월 1~4일 열린 여전도회 제52회 총회는 1988년 창립 60주년(희갑) 기념사업 준비와 특별히 세계 평화, 조국의 평화통일 무제에 역점을 두었다. 국내외적으로 세계 평화와 남북한의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분단된 국가의 비운을 생각하여 통일 문제에 대한 협의 기구와 정책이 정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도회는 1987년 6월 24일 임진각에서 제1회 평화통일을 위한 사회부 주최 기도회로로 100여 명이 모였고, 1987년 총회에서 매년 6월을 평화의 달로 선포하기로 결의하였다. 6월을 평화의 달로 정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사건이 6.25 동란이기 때문에 6월의 아픔을 치료하는 길은 조국의 평화통일뿐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2) 3ㆍ1절 기념예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와 교회여성이 해야 하는 사업 추진과 특히 기독교방송국이 복음방송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후원하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특히 여전도회 7~10대 회장인 김마리아 여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자는 취지를 가지고 1982년부터 시행했다. 본회는 3.1절 기념예배 순서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어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때의 헌금은 본회로 모아져 국내 선교 사업에 쓰이고 있다. 특히 이 헌금은 방송 선교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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