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땅을 밟다
[ 땅끝에서온편지 ]
작성 : 2019년 05월 14일(화) 00:00 가+가-
2010년 디아코니아 개신교 수녀들과 함께 한 김태준 선교사 가족.
2010년 6월 2일, 독일땅을 밟았다. 독일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로서 사역하기 위해서였다. 2001년 강원도 홍천 11사단에서 군목사역을 마친 뒤, 충신교회에서 부목사로서 만 9년의 사역에 이어 허락된 사역의 장이었다. 1년 전 한국기독공보 광고를 보고 지원한 자리였다. 독일남부지방한인교회는 1976년에 세워진 교회로 1대 담임은 김종렬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에서 유럽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셨고, 나는 6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고등학교를 외고 독일어과를 나왔고, 장신대 신학과 학생일 때에 남산 독일문화원을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독일어였다. 거의 20년만에 사역의 도구가 될 줄은 몰랐다. 하나님 앞에 버려진 시간과 노력은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경험을 유용하게 쓰신다. 감사했다.

처음 두 달은 독일어 공부를 위해 슈베비쉬할에서 독일문화원을 다녔다. 나의 직책은 한인교회 목회자이지만, 독일 뷔르템베르크주교회 소속 목사로 고용되어 독일교회와 여러 분야에서 협력하며 사역해야 했기에 독일어는 필수였다. 독일주교회는 이사비용과 함께 두 달 간의 어학경비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지금도 독일어는 여전히 불편하고 어렵다. 대화는 어렵지 않지만, 해외살이에서 외국어는 여전히 외국어로 남는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고충이기도 하다.

처음 머물게 된 곳은 디아코니아 개신교 수녀님들이 사는 건물 안의 게스트룸이었다. 대부분 은퇴하신 분들이 살고 계셨는데, 그분들은 독신으로 디아코니아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봉사기관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사역하셨다. 그분들을 통해 개교회 중심의 한국개신교와는 다른,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한 독일개신교회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구들은 한 달 뒤에 독일로 왔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낯선 땅에서 언제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두 달간의 어학과정을 마치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독일남부지방한인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슈투트가르트, 괴팅엔, 튀빙엔, 트로싱엔 4곳의 한인교회 목회를 담당하며 독일교회와 협력하는 일이었다. 현재 독일에는 130여 개의 한인교회가 있지만, 독일주교회에 속하여 계약을 맺고 한인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는 세 사람뿐이다.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와 이곳에 각각 1명씩인데, 나를 제외한 다른 두 목사는 기장 측 목사이다.

독일생활은 한국에서 생각했던 바와 전혀 딴판이었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모든 것이 느려터져 답답했고, 때로는 우리나라 60~70년대를 보는 듯했다. 벤츠의 나라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로 불편했다. 목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했지만, 6개월이 지난 뒤에는 하나님이 이곳 교회를 사랑하셔서 나를 보내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 한국에서 사역하고 훈련받은 목사가 필요했는지를. 그래도 이 땅에서 들려오는 두 가지 소리는 참 좋았다. 새소리와 교회종소리. 숲이나 공원에서는 어김없이 새소리들이 아침저녁으로 들려왔고, 기독교 문화가 깊이 자리매김되어 시간마다 교회종탑에서 울려나는 종소리는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김태준 목사/독일남부지방한인교회·총회파송 독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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