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19년 05월 17일(금) 00:00 가+가-
성서 가운데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가 있다면 오늘의 비유일 것이다. 분명한 점은 성서가 불의(이중장부)를 조장하지는 않을 터인데, 오늘의 말씀에 의하면, 주인은 빚문서를 고쳐 쓰게 한 청지기의 행동에 대해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에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름 위안이 된다고 한다. 사업상 불가피한(?) 이중장부 행위에 대한 나름의 도피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유는 예수 당시의 팔레스틴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음식물이 있다면, 그것은 올리브유와 밀과 포도주였다. 특별히 갈릴리는 올리브의 땅이라고 불릴 만큼 올리브 나무가 많았다. 올리브 열매와 기름은 음식물 중에서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 가운데 하나로 그 땅의 사람들이 섭취하는 단백질 가운데 약 20% 정도를 제공했다. 또한 팔레스틴의 올리브는 유대의 주요 수입원을 차지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비록 이방 땅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본토에서 생산된 정결한 기름을 수입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기름은 매우 귀중한 것으로 이자율이 100%였다. 예를 들면, 기름 50말을 빌리면 이자가 50말로, 당시의 관례인 선이자를 합친 100말로 기록되었다. 한편, 밀은 통상적인 25%의 이자를 붙여서 거래되었다. 따라서 80말을 빌릴 경우, 이자 20말을 합친 100말이 되었다. 오늘의 비유는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후일을 도모하여 일종의 다운계약서로 채무자로 하여금 장부를 고쳐 쓰게 했다: 기름 100말을 50말로, 밀 100석을 80석으로. 예수 비유의 엉뚱성은 주인이 이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을 알면서도 그를 칭찬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본래의 예수 비유는 여기서 끝이 난다. 결과적으로 청지기가 고쳐 쓰라고 한 액수는 정확하게 이자를 얹지 않은 원래의 채무액이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끼친 손해액은 기름 50말만 해도 500데나리온 정도로 농장 노동자의 1년 반 내지 2년의 품삯이다. 두 번째 사람도 거의 비슷하다. 후견인-피후견인(patron-client) 사회에서 명예가 후견인의 가장 큰 자산이었지만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의 손해를 감수할 주인이 있었겠는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청지기를 칭찬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청지가가 행한 이자놀이가 과연 주인의 뜻이었는가? 어쩌면 애초부터 이자놀이가 주인의 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명예가 자산의 일부였던 로마의 패트로니지 관계망 안에서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도 자산의 낭비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제 청지기가 주인의 자산을 낭비한 일을 경제적 관점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 필자는 비유의 열쇠를 '빚지다'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같은 단어가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오페일로)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오페이레마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기도문에서 '죄'로 번역된 '오페이레마타'는 좀 더 정확하게는 '잘못 또는 빚'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에서 이 단어가 빚이 아니라 잘못을 가리키듯이 본 비유에서도 빚이 아닌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청지기가 한 일은 사람들의 잘못에 이자를 얹어준 행위이다. 또한 성서의 비유에서 흔히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잘못에 이자를 얹어주는 것이 주인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의 비유는 어쩌면 누가의 문맥이 적시하듯이(눅 16:14) 바리새인들을 향한, 또는 성전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뜻)을 맡은 청지기였지만 주인의 뜻과는 달리 잘못을 죄로 규정하고 죄의 이자를 얹어준 불의한 청지기였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선포해야 할 성전 제사장들이 죄용서의 선포 대신에 죄의식을 심어주고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했다.

주기도문에서 '빚, 잘못(오페이레마타)'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깊은 의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를 함의한다. 이러한 이해는 이 비유가 바로 앞의 탕자의 비유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비유는 모두 아들과 청지기가 아버지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눅 15:13; 16:1). 탕자의 비유가 재산을 낭비하고(잘못을 범하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관대한 용서를 주제로 하듯이 본 비유도 잘못한 자에게 자비로운 주인의 용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의 살 길을 찾고자 행한 그 일이 역설적으로 바로 주인이 원하는 일이었기에 주인이 그를 칭찬한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 불의한 청지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피차 갚아야만 할 그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서로에게 잘못을 확대재생산(잘못의 이자놀이) 하면서 살아간다. 나와 이해가 다르고 나의 기대에 부응치 못하거나, 자존심과 감정이 좀 상하면, 때로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죄로 규정하고 그 잘못을 확대재생산하지 않았는가! 용서는 이제 그리스도인 각자의 몫이자 기독교 공동체의 몫이다. 우리 모두는 이를 위한 청지기로 세움 받았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죄의 용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중심적인 일면이며 예수의 가르침의 기조(keynote)이다. 그러므로 '빚, 잘못'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와 동시에 용서받은 자들이 새롭게 살아야 할 사회적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함의한다.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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